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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workdignity</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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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일과 존엄에 관한 법적 노트</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lastBuildDate>Tue, 05 May 2026 15:22:53 GMT</lastBuild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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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es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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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5 May 2026 13:30:0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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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encoded><![CDATA[<p>테스트입니다</p><p>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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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샘플]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사각지대, 빌라 관리비라는 이름의 분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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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5 May 2026 08:02:37 GMT</pubDate>
      <description>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한국이 아파트의 나라가 되어가는 과정을 문화비평의 시선으로 추적한 책이다. 강남 개발과 분양 시스템, 평수와 브랜드의 위계, 거실과 베란다의 배치 ㅡ 그것들이 한국 중산층의 일상과 욕망과 투자 감각을 재구성했고, 결국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형태가 아니라 한국 사회를 작동시키는 일종의 운영체제가 되었다는 것이 책의 큰 줄기다.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한국이 아파트의 나라가 되어가는 과정을 문화비평의 시선으로 추적한 책이다. 강남 개발과 분양 시스템, 평수와 브랜드의 위계, 거실과 베란다의 배치 ㅡ 그것들이 한국 중산층의 일상과 욕망과 투자 감각을 재구성했고, 결국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형태가 아니라 한국 사회를 작동시키는 일종의 운영체제가 되었다는 것이 책의 큰 줄기다. 후속작 〈아파트 게임〉에 이르면 이 운영체제의 작동 방식 ㅡ 입주자대표회의, 관리사무소, 분양가, 시세 ㅡ 이 한국인의 시간과 자원을 어떻게 빨아들이는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p><p>이 책이 직접 다루지 않는 영역이 있다. 아파트가 운영체제가 되는 동안 그 운영체제의 바깥에 남겨진 다른 주거 형태들 ㅡ 빌라, 연립주택, 다세대주택의 풍경이다. 한국 가구의 적지 않은 비율이 이 형태로 거주한다. 그러나 이 거주자들이 매달 받아드는 관리비 고지서의 풍경은,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그려낸 아파트 거주자의 그것과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p><p>내가 받는 빌라 관리비 분쟁 상담의 양상은 대개 비슷하다. 매달 가구당 7만 원에서 15만 원 안팎의 관리비가 청구되는데, 그 사용처가 모호하다. 청소비, 공동전기료, 승강기 유지비, '관리수수료', '예비비' ㅡ 항목은 있지만 영수증과 장부를 본 적이 없다. 어느 날 위탁관리회사가 바뀌었지만 누가 결정한 것인지 입주민들은 알지 못한다. 회계장부를 보여달라고 요청하면 "그동안 그렇게 해온 적이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p><h2>빌라가 사는 두 법률의 사이</h2><p>한국의 빌라가 처한 법적 위치를 이해하려면, 두 개의 법률이 분업하는 방식을 알아야 한다.</p><p>흔히 입에 오르는 「공동주택관리법」은 사실 모든 공동주택에 그대로 적용되는 법이 아니다. 이 법의 강행규정 다수는 '의무관리대상 공동주택'에 한해 작동한다. 300세대 이상이거나, 150세대 이상이면서 승강기 또는 중앙집중식 난방방식 등을 갖춘 단지가 그 범위다(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제2조). 한국의 거의 모든 빌라는 이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 즉, 공동주택관리법이 정한 입주자대표회의의 절차, 관리비 회계의 외부감사, 회계자료의 정기 공개 같은 까다로운 의무는 빌라에 적용되지 않는다.</p><p>빌라에 적용되는 주된 법은 「집합건물의 소유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집합건물법')이다. 이 법은 다음과 같이 정한다. 구분소유관계가 성립하면 구분소유자 전원으로 '관리단'이 당연히 성립하고(제23조), 구분소유자가 10인 이상일 때에는 관리인을 선임해야 한다(제24조). 관리인은 매년 1회 이상 관리단 집회에서 그 사무에 관한 보고를 해야 하고, 회계 관련 장부와 증빙서류를 작성하여 보관할 의무를 진다(제26조). 그리고 이해관계인은 관리인에게 그 보고자료의 열람을 청구하거나 자기 비용으로 등본의 발급을 청구할 수 있다(제26조 제3항).</p><p>여기까지 읽고 이상하다고 느낀다면 정확하다. 법조항은 있다. 문제는 그 조항이 빌라 안에서 작동하는지 여부다.</p><h2>분쟁의 구조 ㅡ 관리단의 부재, 임차인의 위치</h2><p>다수의 빌라에서 관리단은 형식적으로만 존재하거나, 아예 구성된 적이 없다. 빌라 입주민이 자기가 사는 건물의 '관리단 집회'에 한 번이라도 참석해본 경험이 있다면 드문 사례에 속한다. 입주민은 관리단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위탁관리회사와 직접 마주하고, 그 위탁관리회사는 누구의 위임을 받아 어떤 계약 조건으로 관리하는지를 입주민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관리단의 결의나 관리인의 선임 절차가 적법하게 거쳐졌는지를 확인하려면 결국 관리단 집회를 소집해야 하는데, 집회 소집권자는 관리인 또는 일정 비율 이상의 구분소유자로 한정된다. 빌라 구분소유자의 상당수가 그 빌라에 거주하지 않는 임대인인 경우(흔하다), 입주민이 동의를 모으는 일은 거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에 가깝다.</p><p>더 곤란한 것은 임차인의 위치다. 빌라 거주자의 다수는 임차인이지만, 집합건물법이 보장하는 권리의 다수는 구분소유자(즉, 임대인)에게 귀속된다. 매달 관리비를 부담하는 자는 임차인이지만, 의결권은 임차인에게 없다. 임차인이 회계자료의 열람·등사를 청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임차인 역시 '이해관계인'에 해당한다고 보는 견해가 다수이지만(법무부 집합건물법 표준규약 해설 등 참조), 현장에서 관리인이 이를 순순히 인정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임차인은 청구서를 받고 송금하는 행위를 매달 반복하게 된다.</p><p>이러한 풍경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아파트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아파트의 운영체제는 적어도 입주자대표회의라는 견제 장치, 관리비의 K-apt 공시 의무, 외부 회계감사 같은 제도적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빌라는 그 인프라의 거의 전부를 결여한 채, 같은 도시의 같은 거리에 서 있다.</p><h2>무엇을 할 수 있는가</h2><p>법전 안에는 빌라 거주자를 위한 도구가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다. 작동시키는 일이 거주자 한 사람의 일상에 무겁다는 사실과는 별개로.</p><p>첫째, 관리비 회계자료의 열람·등사를 서면으로 청구한다(집합건물법 제26조 제3항). 회신이 없거나 거부되면, 그 자체로 다음 단계의 분쟁조정 또는 가처분 신청의 근거가 된다. 둘째, 동조하는 다른 입주민·구분소유자와 함께 관리단 집회 소집을 추진한다. 집회의 결의로 관리인의 해임, 관리회사의 변경, 외부 회계감사의 시행 등을 의결할 수 있다. 셋째, 시·도에 설치된 집합건물 분쟁조정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한다. 2020년 집합건물법 개정으로 도입된 이 절차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며, 위탁관리계약의 적법성, 관리비 산정의 적정성 같은 사안을 다룰 수 있다. 넷째, 그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회계장부 열람·등사 가처분 또는 부당이득반환 청구의 본안소송으로 진행한다.</p><p>이 절차들이 모두 가능하다는 것과, 매일 출퇴근하는 한 사람이 그 절차를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변호사로서 내가 마주하는 빌라 관리비 의뢰인의 다수는, 의문을 가진 지 1~2년 만에 사무실 문을 두드린 사람들이다. 그동안 그들은 영수증을 받지 못한 관리비를 매달 송금했다.</p><h2>한국이 아파트의 나라가 되는 동안</h2><p>박해천이 분석한 한국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정확하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는 정확하기 때문에 그늘도 정확하다. 한국이 아파트라는 운영체제를 정교하게 다듬는 동안, 그 운영체제의 바깥에 있는 빌라·연립·다세대의 거주자들은 자신의 관리비에 대한 통제권을 갖기 위해 매번 처음부터 길을 만들어야 했다. 법은 그들을 위한 도구를 마련해두었지만, 그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안목과 정보의 인프라는 그들 각자의 일상에 떠넘겨졌다.</p><p>이것이 한국 도시 거주의 또 다른 얼굴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누구에게나 약속되었으나, 그 약속이 실제로 이행되는 범위는 의무관리대상의 경계 안쪽이다. 그 경계 바깥에서 매달 관리비 고지서를 받아들고 작은 의문을 삼키는 한 사람의 일상은,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비추지 않은 그늘에서 지금도 반복된다. 빌라 관리비 분쟁이 사소해 보인다면, 그 사소함이야말로 이 그늘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우리 풍경의 일부가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증거다.</p>]]></content:encoded>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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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샘플] 검찰의 출석요구서를 받게 된 어느 날, K가 알았어야 했던 것들</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sosongpeurancheu-kapeuk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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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5 May 2026 07:35:54 GMT</pubDate>
      <description>요제프 K는 자신의 서른 번째 생일 아침, 늘 묵던 하숙집의 침대에서 깨어난다. 평소처럼 아침을 가져와야 할 하녀 대신, 검은 양복을 입은 두 명의 사내가 방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K가 체포되었다고 통지한다. 무슨 죄로 체포되는 것인지, 그들에게 어떤 권한이 있는지, K의 어떠한 질문에도 그들은 답하지 않는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요제프 K는 자신의 서른 번째 생일 아침, 늘 묵던 하숙집의 침대에서 깨어난다. 평소처럼 아침을 가져와야 할 하녀 대신, 검은 양복을 입은 두 명의 사내가 방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K가 체포되었다고 통지한다. 무슨 죄로 체포되는 것인지, 그들에게 어떤 권한이 있는지, K의 어떠한 질문에도 그들은 답하지 않는다.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K는 이후 1년 동안 어디에 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은 법원 주변을 헤매고, 변호사를 선임하고, 화가와 신부를 만나며 점점 자신의 사건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에, K는 자신이 결국 죄를 지은 자였는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한 채 채석장 같은 곳에서 두 명의 사내에 의해 처형된다.</p><p>프란츠 카프카가 1914~15년 사이에 쓰고 사후인 1925년 발표된 미완 장편소설 〈소송〉의 시작과 끝이다.</p><h2>카프카의 직업과 K의 비극</h2><p>카프카는 보험회사의 법률 담당자였다. 프라하 대학에서 법학 박사를 받고 노동자상해보험공사에서 14년을 근무하며 산업재해 사건을 다뤘다. 노동자가 회사·국가·법원이라는 거대한 절차 앞에서 어떻게 무력해지는지를 매일 관찰했던 사람이 쓴 소설이라는 점은, 〈소송〉을 읽을 때 종종 잊혀진다. 이 작품을 그저 추상적인 부조리의 우화로만 읽고 마는 독자가 많은 것이다. 〈소송〉은 우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절차에 빨려 들어간 한 시민의 구체적인 경험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p><p>내가 이 작품을 다시 꺼내든 것은, 형사 변호인 자격으로 검찰 조사에 동행할 때마다 K의 첫 장면이 떠올라서다. 영장이 아닌 한 장의 출석요구서(시민들은 흔히 '소환장'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한 명칭은 '피의자 출석요구서'다)를 받아들고 변호사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민의 표정에는, K의 그것이 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알지만 그것이 어느 죄목의 어느 조항에 어떻게 해당하는지는 알지 못하고, 앞으로 며칠 또는 몇 달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짐작하지 못하는 자의 표정.</p><h2>K가 한국에서 깨어났다면</h2><p>만약 K가 1910년대 프라하가 아니라 2020년대 한국에서 그 아침을 맞이했다면, 그가 알았어야 할 것들은 의외로 명료하게 법전에 적혀 있다.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인류가 K들의 비극을 통해 어렵사리 정리해놓은 권리들이다.</p><p>먼저, 헌법 제27조 제4항.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이른바 무죄추정(無罪推定)의 원칙이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선언이 아니라 수사기관이 시민을 다룰 때의 태도와, 그 시민이 자신을 변호할 때 누려야 할 지위에 관한 헌법적 규범이다. 헌법재판소는 이 원칙이 형사피고인뿐 아니라 피의자 단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해왔다. 죄가 확정될 때까지 K는 죄인이 아니라 시민이다.</p><p>다음, 헌법 제12조 제2항.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이를 구체화한 것이 형사소송법 제244조의3(진술거부권 등의 고지)이다.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은 피의자를 신문하기 전에 ▲일체의 진술을 하지 아니하거나 개개의 질문에 대하여 진술을 하지 아니할 수 있다는 것 ▲진술을 하지 아니하더라도 불이익을 받지 아니한다는 것 ▲진술을 거부할 권리를 포기하고 행한 진술은 법정에서 유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 ▲신문을 받을 때에는 변호인을 참여하게 하는 등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같은 조 제1항). 이 고지를 누락한 채 받은 진술은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대법원 판례).</p><p>마지막으로, 헌법 제12조 제4항.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헌법재판소는 이 규정이 단지 체포·구속된 자뿐 아니라 임의로 출석한 피의자에게도 적용된다고 봐왔다. 즉, 출석요구서를 받고 자기 발로 검찰청에 들어간 시민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헌법상 권리를 갖는다.</p><p>이상의 권리는 카프카 시대의 K가 알지 못했던 것이고, K의 비극은 K 개인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권리 자체가 아직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100년 가까이 지난 우리에게는 K가 갖지 못했던 도구들이 있다. 적어도 법전 안에는.</p><h2>그러나, 조사실의 풍경</h2><p>법전 안에 있다는 말과 조사실 안에서 작동한다는 말은 다른 차원의 진술이다. 임의 동행과 임의 출석이라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수사에서, 시민은 '임의'라는 단어가 풍기는 자율성에 비해 훨씬 비대칭적인 권력 앞에 서 있다. 출석요구서의 문구는 부드럽지만, 그 부드러움 뒤에는 응하지 않을 경우 체포영장이 청구될 수 있다는 사실이 깔려 있다.</p><p>진술거부권은 행사할 수 있지만, 거부한 항목 옆에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지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사건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을 시민은 직감한다. 법원이 진술거부 자체를 양형의 가중 사유로 삼는 것은 위법이라는 판례가 있음에도, 검사와 판사의 마음속 무게추가 어디로 기울지를 시민이 신뢰하기는 쉽지 않다.</p><p>변호인 조력권 역시 마찬가지다. 권리는 보장되어 있지만, 변호사를 선임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지, 국선변호인의 조력이 충분한지, 변호사가 조사실에 입회한다고 해서 신문의 강도가 실제로 약화되는지는 별개의 영역에 있다. 내가 입회한 어떤 조사에서 검사는 변호인의 의견 진술 요청을 다섯 번 가량 거절했고, 마지막 순간에야 마지못해 한 줄의 의견을 듣고는 곧장 다시 피의자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그 절차는 위법은 아니었지만, 권리가 행사되는 풍경의 한 단면이긴 했다.</p><p>K가 한국에서 깨어났다면, 그는 권리의 목록을 받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록이 실제로 그를 보호할 것인지는, 그가 어떤 변호사를 만나는지, 그가 자신의 사건 앞에서 얼마나 침착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가 속한 사회가 무죄추정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달라졌을 것이다.</p><h2>카프카적이라는 것</h2><p>'카프카적(Kafkaesque)'이라는 형용사가 일상어가 된 것은 카프카가 어떤 보편적인 무엇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시민이 거대 절차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자신의 사건이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감각, 그 절차 안에서 쓰이는 언어가 자신의 언어와 다르다는 발견. 이것은 100년 전 프라하의 K만의 경험이 아니라, 영장실질심사를 기다리며 법원 복도에 서 있는 오늘날의 시민에게도 그대로 작동한다.</p><p>법은 K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법이 K를 보호하기 위해 작동하려면 K가 자신의 권리를 알고 있어야 하고, 그 권리를 행사할 도구를 갖고 있어야 하며, 그 행사가 사회적으로 비난받지 않아야 한다. 한국 사회는 이 세 조건 중 어디까지 와 있는가. 무죄추정은 언론 보도 제목과 댓글의 풍경 속에서 얼마나 진지하게 다뤄지는가(우리는 기소 단계에서 이미 사람의 인생을 정리해버리는 데 익숙하지 않은가). 진술거부권을 행사한 자에 대해 우리는 즉시 "켕기는 게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변호사를 선임한 자를 우리는 "비싼 변호사를 산 부유층"으로 부르지 않는가. 권리의 행사는 매번 사회적 평판이라는 비용을 동반하고, 그 비용이 충분히 큰 사회에서는 권리란 결국 자산을 가진 자의 전유물이 된다.</p><p>K의 비극은 그가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사건의 주체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권리의 목록은, K가 자신의 사건의 주체로 남기 위한 도구다. 그 도구가 책 속에 머물지 않고 조사실로 걸어 들어오게 하는 일은, 변호사 한 사람의 입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권리가 권리로서 작동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K들의 연대로만 가능하다.</p><p>카프카는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원고를 모두 불태워 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브로트는 이를 어겼고, 우리는 K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K가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K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단순한 데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 그것이 K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비싼 교훈이다.</p>]]></content:encoded>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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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샘플] 퇴근 후 카톡, 그것은 노동일까</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toegeun-hu-katok-geugeoteun-nodongilkk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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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5 May 2026 05:38:40 GMT</pubDate>
      <description>밤 열한 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누우려는 순간, 휴대전화에 알림이 뜬다. &quot;내일 회의 자료에 이 부분만 반영해서 보내주세요.&quot; 부장의 카톡이다. 짧은 문장이지만, 그 한 줄을 읽는 순간 머릿속은 다시 사무실로 끌려간다. 이미 잠옷으로 갈아입은 몸은 노트북 앞으로 향한다. 다음 날 아침까지의 한 시간 반은 누구의 시간이었을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밤 열한 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누우려는 순간, 휴대전화에 알림이 뜬다. "내일 회의 자료에 이 부분만 반영해서 보내주세요." 부장의 카톡이다. 짧은 문장이지만, 그 한 줄을 읽는 순간 머릿속은 다시 사무실로 끌려간다. 이미 잠옷으로 갈아입은 몸은 노트북 앞으로 향한다. 다음 날 아침까지의 한 시간 반은 누구의 시간이었을까.</p><p>근로기준법은 근로시간을 "근로자가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 있는 시간"<sup id="f981339a" text="근로기준법 제50조(근로시간) https://www.law.go.kr/lsLawLinkInfo.do?chrClsCd=010202&lsJoLnkSeq=900552087" number=null data-footnote-ref="true" data-footnote-id="f981339a" data-footnote-text="근로기준법 제50조(근로시간) https://www.law.go.kr/lsLawLinkInfo.do?chrClsCd=010202&lsJoLnkSeq=900552087" class="footnote-ref"><a href="#fn-f981339a" id="fnref-f981339a" data-footnote-anchor="true">[?]</a></sup>으로 정의한다. 사무실에 있는 시간만이 아니라, 사용자의 업무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사용하는 모든 순간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정의는 명료해 보이지만, 카톡 메신저가 일과 일상의 경계를 지워버린 시대에는 묘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알림 한 번에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로 즉시 소환된다. 출퇴근 시간은 디지털 호출 앞에서 무력하다.</p><p>법원은 그동안 메신저를 통한 업무지시에 응답한 시간도, 그리고 휴일·심야의 대기상태도 근로시간으로 인정해온 사례를 쌓아왔다. 그러나 현실에서 노동자가 그 시간을 임금으로 받아내기까지의 거리는 멀다. 메시지가 왔다는 사실, 그것을 처리한 시간, 그리고 그것이 사용자의 명시적 지시였다는 점을 모두 입증해야 한다. 입증의 부담은 거의 전적으로 노동자에게 있다. 권리가 있다는 말과,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p><p>최근 몇 년 동안 국회에는 이른바 "연결되지 않을 권리(Right to Disconnect)"를 명문화하려는 법안들이 반복적으로 발의돼왔다. 프랑스가 2017년 시행한 droit à la déconnexion이 이름의 출처다. 다만 한국에서 발의된 법안들은 대부분 일정 규모 이상 사업장에 한정하거나 처벌 조항 없이 선언적 규정에 그쳐, 통과되더라도 실효성을 어디까지 담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따라붙는다. 입법은 늦고, 그동안 노동자의 밤은 여전히 카톡 알림에 잠긴다.</p><p>그렇다면 지금, 퇴근 후 메시지를 받은 노동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첫째, 응답한 사실과 시간을 기록한다. 화면 캡처 한 장과 메모 한 줄이 훗날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둘째, 정기적이고 반복적인 업무지시라면 취업규칙이나 근로계약서를 펼쳐 시간외근로에 관한 규정과 동의 절차를 확인한다. 동의 없이 이뤄진 시간외근로는 그 자체로 다툼의 여지가 있다. 셋째, 가능하다면 개인의 호소가 아니라 집단의 문제로 제기한다. 노동조합이 있다면 노동조합으로, 없다면 적어도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의 공유로. 사용자에게 한 사람의 메일은 잘 도달하지 않지만, 같은 내용의 다섯 통은 다르게 읽힌다.</p><p>물론 이 모든 조언은 어딘가 공허하다. 부장의 카톡을 무시할 수 있는 노동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법은 권리를 보장하지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조건까지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노동법은 늘 두 개의 얼굴을 가진다. 하나는 법전 안에서 단정하게 정리된 권리의 목록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에서 그 권리를 꺼내드는 데 드는 비용과 위험의 풍경이다. 사무실에서 내가 매일 마주하는 것은 후자의 얼굴이다. 임금체불 진정을 넣었다가 해고를 걱정하는 사람,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망설이며 "다음 직장에 소문이 나면 어쩌나" 묻는 사람, 그리고 카톡 알림이 무서워졌다고 말하는 사람들.</p><p>연결되지 않을 권리는 결국 일과 일상의 경계를 누가 그을 것인가의 문제다. 사용자가 그을 수도 있고, 노동자 개인이 그을 수도 있고, 법이 그을 수도 있다. 지금 한국에서 이 선은 대체로 사용자가 그어왔다. 그 선을 노동자 쪽으로 조금 옮기는 작업, 그것이 노동법이 일상에 닿는 한 방식이다.</p><p>오늘 밤에도 누군가의 휴대전화는 울릴 것이다. 그 알림 앞에서, 자신의 시간이 지금 누구의 것인지 한 번쯤 묻는 것. 그 질문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 거기서부터가 시작이다.</p>]]></content:encoded>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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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노동법, 보호와 남용 사이의 문제</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mt-20251107-58482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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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6 Nov 2025 17:05:00 GMT</pubDate>
      <description>유명 베이커리에서 일하던 26세 청년이 주 80시간이 넘는 노동 끝에 회사 숙소에서 숨을 거뒀다. 사망 전날 15시간 동안 한 끼도 먹지 못한 채 일했다고 한다. 회사는 근무기록이 없다며 유족의 과로사 주장을 부인하고 지문인식기 오류를 이유로 출퇴근자료 제공 역시 거부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유명 베이커리에서 일하던 26세 청년이 주 80시간이 넘는 노동 끝에 회사 숙소에서 숨을 거뒀다. 사망 전날 15시간 동안 한 끼도 먹지 못한 채 일했다고 한다. 회사는 근무기록이 없다며 유족의 과로사 주장을 부인하고 지문인식기 오류를 이유로 출퇴근자료 제공 역시 거부했다. 며칠 전 회사가 유족과 극적으로 합의하고 이 사건을 마무리했지만 의문이 남는다. 목숨을 잃기 전 청년은 일을 시킨 상사에게 "못 하겠다"는 말을 왜 하지 않았을까.</p><p>이와 완전히 반대되는 사건을 얼마 전에 들었다. 한 회사에서 발생한 직장 내 괴롭힘 사례인데 상사의 업무지시를 거부한 직원과 관련된 일이다. 상사가 사무직원에게 행정처리를 지시했지만 "왜 제가 이 일을 해야 하나요"라고 되물으며 업무수행을 거부했다고 한다. 애매한 규정을 사유로 상사가 지시한 업무는 자신이 담당하는 직무범위 밖의 일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시는 합리적이었고 업무수행을 거부한 것이 부당해 보였다.</p><p>두 사례는 한국 작업장 현장의 극단을 보여주면서 이를 마주한 노동법의 가장 어려운 과제를 드러낸다. 노동법은 어떻게 약자를 보호하면서도 그 보호가 무기가 되는 것을 막을 것인가.</p><p>근로기준법 제53조는 주52시간 근로시간 상한제를 규정했다. 하지만 베이커리 사건의 현장에서 이 법조문은 아무런 효력을 발하지 못했다. 심지어 근로자가 사망한 건에서도 회사가 근로시간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으면 근로자가 카카오톡 대화와 교통카드 기록으로 자신의 노동을 증명해야만 했다. 사용자와 노동자간 힘의 차이가 명백히 보인 장면이다. 이때 근로기준법 제53조가 근로자에게 지시된 노동을 거부할 만한 현실적인 힘이 될 수는 없었을까.</p><p>두 번째 사례에선 같은 법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상사의 정당한 업무지시를 부하가 거부하면서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한 장면을 돌이켜보자. 괴롭힘 신고는 근로기준법 제76조의3이 규정한 권리의 행사였지만 상사의 지시가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에 해당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p><p>일단 근로자의 신고가 접수되면 그것의 진위와 관계없이 괴롭힘 신고에 따른 사용자의 의무이행이 요구된다. 괴롭힘 신고를 접수한 경우 지체없이 당사자를 대상으로 그 사실확인을 위해 객관적으로 조사를 실시해야 하고 후속조치를 이행해야 한다.</p><p>나의 판단과 같이 부하가 업무수행을 회피하기 위해 이 제도를 악용한 것이라면 조직에 어떤 해악을 끼칠까. 정당한 업무 지시를 한 관리자를 징계한다면 그 사이 조직에는 '업무를 섣불리 지시하면 괴롭힘 신고를 당한다'는 인식이 퍼진다. 누구도 업무를 책임지려 하지 않고 조직의 기강이 무너질 수 있다.</p><p>직장 내 괴롭힘 금지제도는 2019년 도입돼 많은 피해자를 구제했지만 일부에선 '업무를 회피할 기회'나 '보복'의 수단으로 남용된 것도 사실이다. 제도의 본래 취지인 약자보호가 아니라 정당한 업무수행을 방해하는 도구가 돼버린 것이다.</p><p>전통적으로 노동법은 '근로자는 약자'라는 전제에서 출발했지만 법이 적용되는 장면들은 현실의 복잡한 문제들 속에 있다. 노동법의 목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어떤 노동자는 말할 수 없는 약자고, 어떤 근로자는 제도를 활용할 줄 아는 전략적 행위자다.</p><p>법률은 작업장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풀어주는 만능키가 아니어서 법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분쟁이 발생했을 때 다른 법의 운명처럼 노동법 조문들이 모든 현실사례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은 비극적이다. 결국 법과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으로 돌아와 문제를 차분하게 봐야 한다. 우리가 작업장 내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일반적 상식으로서 '노동법 감정'을 함께 합의할 수 있다면 문제해결의 단초가 되지 않을까.</p>]]></content:encoded>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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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직장 내 괴롭힘 개정 법률안 유감</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mt-20241206-221695</link>
      <guid isPermaLink="true">https://workdignity.com/posts/mt-20241206-221695</guid>
      <pubDate>Thu, 05 Dec 2024 17:05:00 GMT</pubDate>
      <description>직장 내 괴롭힘의 금지에 관한 근로기준법 제76조의2는 다음과 같다. &apos;사용자 또는 근로자는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직장 내 괴롭힘의 금지에 관한 근로기준법 제76조의2는 다음과 같다. '사용자 또는 근로자는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p><p>이 조항은 문언 자체로는 괴롭힘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하지 않았다. 법률이 시행된 지 5년이 넘었지만 작업장에서 혼란이 발생하는 것은 일정부분 추상적인 법조문에서 기인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실무상 문제가 되는 지점은 바로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는 행위가 무엇인가'와 관련돼 있다. 상사가 퇴근 후 SNS로 업무를 지시하는 것은 괴롭힘으로 인정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오후 6시5분에 보낸 메시지와 밤 10시5분에 보낸 것을 어떻게 다르게 평가해야 할까. 메시지를 한 번 보낸 것과 두 번, 혹은 다섯 번 보낸 것은 또 어떻게 다른가. 업무지시의 대상이 당시 중대하고 필요불가결한 어떤 것이었다면.</p><p>법조문은 현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 이에 고용노동부가 직장 내 괴롭힘의 객관적 요건을 강화해 현장의 혼란을 해소하기 위한 입법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몇 차례 관련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에 따라 괴롭힘 판단기준으로 지속성과 반복성을 법률요건에 추가하고자 하는 것이다(2023년 11월23일자 경향신문 보도).</p><p>고용노동부가 용역을 통해 받은 보고서는 일회성이라도 괴롭힘으로 인정되는 행위와 지속, 반복돼야 괴롭힘으로 인정되는 행위를 구분하자고 제안한다. 이어서 후자의 경우 '3개월 이상 지속되고 평균적으로 주 1회 이상 반복되는 행위'에 한해 괴롭힘으로 인정하자는 것이다.</p><p>폭력과 폭언, 퇴사강요, 부당징계와 같이 외형상 명백히 괴롭힘으로 인정할 수 있는 행위엔 강화된 요건이 적용되지 않는다. 문제는 업무능력 무시, 성과 미인정, 보상에서 차별, 힘든 업무 몰아주기, 주요 의사결정에서 배제, 휴가 불승인, 업무적으로 지나친 감시, 회식참석 강요 등과 같이 상사의 업무상 지휘·감독권이 인정되는 부분에 지속성과 반복성 요건을 추가하자는 점에 있다.</p><p>개정안이 괴롭힘 행위를 분류하고 요건을 강화하는 취지엔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엿보인다. 경미한 사안에서도 신고가 남발되거나 심지어 허위신고가 증가해 직장 내 질서가 무너진 사례가 도처에서 발견된다. 한 공공기관에선 전체 직원의 절반 이상이 신고자와 피신고자로 사건에 연루돼 기관의 운영 자체가 어려워진 경우도 있다. 기간제 근로자가 계약기간 만료 즈음에 괴롭힘을 당했다고 허위로 신고하면서 근로기준법상 신고자 불이익 처우금지 원칙에 따라 근로계약 연장을 기대하기도 한다. 심지어 상급자가 하급자의 보고서를 공개된 사무실에서 빨간펜으로 수정했다는 사실만으로 괴롭힘 신고를 하는 사건까지 접하면 근로기준법 자체가 문제는 아닌지 의문이 든다.</p><p>분명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률이 시행된 후 남용되는 신고와 허위신고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여전히 괴롭힘을 당하고도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필자의 판단엔 괴롭힘 미신고 사례가 허위신고 건보다 훨씬 많다고 본다. 한국의 직장문화 현실에서 명백한 피해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피해사실에 대해 제도적 해결을 도모하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기업 근로자들은 퇴사를 각오하고 피해신고를 할 수밖에 없다. 신고를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경우는 법률에 따라 고용을 보장받는 공무원이거나 신분이 안정된 공기업, 공공기관 근로자가 대부분이다.</p><p>이러한 현실에서 괴롭힘 인정요건에 지속성과 반복성을 추가하는 경우 피해신고를 더 어렵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현행 법률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고용노동부의 요건강화 개정안이 재고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p>]]></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상사의 빨간펜은 직장 내 괴롭힘이 될 수 있을까</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mt-20240808-797208</link>
      <guid isPermaLink="true">https://workdignity.com/posts/mt-20240808-797208</guid>
      <pubDate>Wed, 07 Aug 2024 17:03:00 GMT</pubDate>
      <description>&apos;직장내괴롭힘금지법&apos;이 2019년 7월 시행된 지 만 5년이 경과했다. 올해 4월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3년 접수된 직장 내 괴롭힘 신고는 모두 1만28건이다. 하루평균 27건 정도로 전년보다 12% 늘었는데 이는 5년 새 신고가 2배 이상 늘어난 수치라고 한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직장내괴롭힘금지법'이 2019년 7월 시행된 지 만 5년이 경과했다. 올해 4월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3년 접수된 직장 내 괴롭힘 신고는 모두 1만28건이다. 하루평균 27건 정도로 전년보다 12% 늘었는데 이는 5년 새 신고가 2배 이상 늘어난 수치라고 한다. 지난해 처리가 완료된 사건 가운데 60% 넘는 사건이 조사결과 법 위반이 없었거나 근로기준법 적용대상 사업장이 아닌 경우 또는 동일민원이 중복신고된 경우 등이었다(연합뉴스 2024년 4월7일자 보도).</p><p>작업현장에서 직장 내 괴롭힘 관련 갈등은 접수된 사건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일선 변호사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편 고용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접수된 사건의 절반이 넘는 사건이 '무혐의' 처분되고 겨우 10% 남짓 되는 사건이 개선지도, 과태료 처분, 검찰 송치로 사건이 종결된다고 한다. 신고는 많지만 괴롭힘으로 인정되는 비율이 낮다는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직장 내 괴롭힘 과잉·허위신고가 많다는 의견이 있고 반대로 사건 조사자가 괴롭힘 판단을 소극적으로 한 결과라는 견해도 존재한다.</p><p>우리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의 정의는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다. 그러나 현실에서 법률의 문언 자체만으로 우리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판단을 곧바로 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면 이 법률조항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하며 요건을 가중하면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일각의 주장처럼 업무상 적정범위와 신체적·정신적 고통에 대한 정의를 더 명확히 하는 것이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과잉·허위신고를 줄여줄 수 있을 것인가.</p><p>법률요건이 강화되면 신고 자체가 축소되는 것은 쉽게 예상되지만 이에 따라 괴롭힘 사건 조사자의 적극적 판단을 통해 괴롭힘이 예방될 것이라는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 괴롭힘 유형 중 폭행이나 노골적 왕따 같은 외부에 표출된 사례는 그 판단이 쉽다. 그러나 지난해 접수된 신고건수 중 가장 많은 유형을 차지한 폭언(32.8%)은 제3자가 판단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p><p>본부장인 상사가 부하직원과 면담에서 한 이런 발언은 괴롭힘인지 생각해보자. "지금 갈등을 빚는 부장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바로 인사조치하겠다." 상사가 부하직원과 일상적인 업무와 관련해 보고와 논의, 승인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오가는 대화는 모욕이나 협박 등의 괴롭힘 행위로 인정될 여지가 적다. 그러나 단 한 번의 면담이라 할지라도 인사권을 가진 상사의 직장 내 지위를 고려하면 인사조치 운운한 상사의 대화는 부하에게 커다란 정신적 고통을 줄 수 있고 결국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인정될 여지도 있는 것이다.</p><p>노동법책에 소개된 이런 사례는 어떤가. 신고인이 직장 내 괴롭힘 행위라고 주장한 행위가 "팀장이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에 빨간펜으로 줄을 긋고 엑스(X)표를 했으며 다른 직원이 작성한 보고서를 참고해서 다시 작성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행위 자체만으론 괴롭힘으로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이다.</p><p>결국 업무상 대화 내지 지시는 그 자체로 판단되기보다 당사자들의 지위, 대화와 지시의 내용과 당시 정황에 따라 괴롭힘 성립 여부가 달라질 것이다. 작업장에서 갈등을 줄이기 위해 현 시점에선 섣부른 법률개정보다 무엇이 괴롭힘인지에 대한 교육과 계몽이 필요하다. 고용노동부는 2019년 괴롭힘 관련 매뉴얼을 통해 그 사례를 적시했지만 그 내용이 추상적이어서 실제 사건을 판단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지난 5년간 축적된 법원의 판결과 고용노동부의 처분사례가 충분히 누적됐으니 이를 활용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양지훈 변호사)</p>]]></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apos;직장 내 괴롭힘&apos; 판단이 어려운 이유</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mt-20230210-166811</link>
      <guid isPermaLink="true">https://workdignity.com/posts/mt-20230210-166811</guid>
      <pubDate>Thu, 09 Feb 2023 17:02:00 GMT</pubDate>
      <description>근래에 입법된 노동 관련 법률 중 직장인의 일상적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법안은 무엇일까. 필자는 우리 작업장 문화를 바꾸고 있는 &apos;직장내괴롭힘금지법&apos;을 꼽고 싶다.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조항들은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노동조합법 등의 개정안에 반영돼 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근래에 입법된 노동 관련 법률 중 직장인의 일상적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법안은 무엇일까. 필자는 우리 작업장 문화를 바꾸고 있는 '직장내괴롭힘금지법'을 꼽고 싶다.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조항들은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노동조합법 등의 개정안에 반영돼 있다.</p><p>이 중 기본이 되는 근로기준법 제76조의2는 직장 내 괴롭힘의 금지를 이렇게 정의한다. '사용자 또는 근로자는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이하 '직장 내 괴롭힘'이라 한다)를 해서는 아니 된다.'</p><p>기존 노동법이 임금, 근로시간, 휴게시간 등과 관련된, 주로 정량적인 부분에 맞춤한 것이었다면 직장내괴롭힘금지법의 내용은 근로자의 일상과 조직문화 같은 정성적인 부분에 초점을 둔 법안이다. 그런 만큼 법률의 내용이 추상적일 수밖에 없고 현실에 적용하고 법률을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게 발생한다.</p><p>예컨대 위 조문의 내용 중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라는 요건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도 실제로는 쉽지 않다. 한 조직에서 '지위의 우위에 있는 상사'와 '관계의 우위에 있는 부하'라는 특수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상사가 조직 내에서 언제나 괴롭힘의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고 '관계의 우위'에 있는 부하 직원에 의해 괴롭힘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p><p>실제로 하급자들의 직장 내 괴롭힘이 문제가 된 최근 행정심판에서 부하직원이 '관계의 우위'를 이용한 괴롭힘의 가해자라고 인정된 사실이 있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된 하급자는 혼자만 괴롭힘 가해를 한 것은 아니고 다른 하급자들과 함께 그룹장인 피해자 상사를 괴롭혔는데 직급이 낮더라도 여러 명이 함께한 사정이 고려돼 관계의 우위성이 인정된 것으로 보인다.</p><p>두 번째로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은 행위 역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은행의 일선 지점을 무대로 한 드라마 '사랑의 이해'에서 소개된 사례가 이해에 도움을 준다. 극 중 육시경 지점장은 무기계약직 텔러인 주인공 안수영에게 고객과의 식사접대를 강요하는데 수영이 이를 거부하자 그녀에게 문서고 정리를 촉박한 시일 내에 완수할 것을 명령한다. 같은 지점 근무자라면 누구나 그러한 지시를 접대거부에 대한 '업무상 보복'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이 사건을 실제 노동위원회의 행정심판이나 법원의 판결로 가져가면 쉽게 속단할 수 없게 된다.</p><p>드라마에선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수영이 처리해야 하는 문서고 정리는 분명 은행 지점에서 필요한 업무임이 확실하다. 다만 지점장이 요구하는 것처럼 주말까지 이용해서 긴급히 처리해야 하는 업무상 필요성은 보이지 않는다. 업무량 또한 수영이 혼자 처리하기에는 너무 많기도 하다.</p><p>지점장이 '직장에서의 지위'나 '관계의 우위'를 이용해 수영에게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했다는 점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여기서 지점장이 수영에게 문서고 정리업무를 지시한 전후 사정과 맥락은 지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앞서 본 것처럼 지점장은 수영의 접대거부에 대한 보복성 명령으로 긴급히 필요하지도 않은 업무지시를 내린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필자가 수영의 법률대리인이라면 이와 같은 업무지시의 맥락을 강조해서 변론할 것이다.</p><p>물론 실제 현실은 더 복잡하고 애매한 경우가 많다. 조금 영리한 지점장이었다면 수영의 접대거부 의사표시 시점으로부터 시간적 간격을 두고 문서고 정리든 무엇이든 보복을 시도했을 것이다. 직장내괴롭힘금지법에 따라 각 사안과 행위에 대한 판단이 어려운 점이 여기에 있다. 여전히 이 법률은 형성되는 중이며 시간이 더 지나면 이 법률로 인해 우리 직장의 일상이 더 많이 달라질 것이다.</p>]]></content:encoded>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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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pos;역겨운 밥벌이&apos;에 의미 불어넣기...당신은 왜 오늘도 회사에 출근하는가?</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210614-850276</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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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4 Jun 2021 00:58:29 GMT</pubDate>
      <description>왜 일하는가? 당신은 왜 오늘도 회사에 출근하는가? 이제 ‘일을 통한 자아실현’ 따위의 한가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는 한국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출근하는가. 모두가 주식과...</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왜 일하는가? 당신은 왜 오늘도 회사에 출근하는가? 이제 ‘일을 통한 자아실현’ 따위의 한가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는 한국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출근하는가. 모두가 주식과 부동산, 가상화폐에 파묻힌 지금, 일의 보람과 의미를 찾는 자가 있다면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취급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삶의 의미를 찾는 자라면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p><p></p><p>일본 대기업 교세라의 창업자이자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가 쓴 <왜 일하는가 : 지금 당신이 가장 뜨겁게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이나모리 가즈오, 다산북스 펴냄)를 읽었다. 이 책은 사실 제목과 달리 ‘왜 일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보다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는데, 저자는 ‘삶의 의미는 일을 열심히 하는 데 있으므로 일을 열심히 하는 삶이 곧 성공한 삶’이라고 동어 반복적으로 주장한다.</p><p></p><p>책의 중심 주제는 목차를 통해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마음가짐부터 바꿔라, 제품을 끌어안고 잠들 만큼의 애정으로, 일을 통해 화를 다스린다, 꼭 이루겠다고 간절히 마음먹어라, 하지 않을 뿐 못할 일은 없다, 99퍼센트도 부족하다, 최고가 아닌 완벽을 꿈꿔라” 등.</p><p></p><p>저자의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면, 그것은 일개 사원이었던 그가, 자신의 손으로 거대 기업을 일구어 기업가로 성공한 이력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의 삶으로 노동관을 현실에서 증명했을 때, 그의 주장은 허투루 들리지 않게 된다. 한국 사례로 따지면, 현대그룹을 설립한 고 정주영 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읽을 때와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p><p></p><p><strong>자아실현으로써의 일?</strong></p><p></p><p>그는 “노동의 진짜 의미는 자기가 맡은 일을 달성하고 실적을 내는 것뿐만 아니라 개인의 내면을 완성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왜 일하는가> p. 45). 일을 잘하는 것이 우리가 배워왔던 ‘자아실현’과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말과 달리 현실에서 우리에게 노동은, 타율적이고 반복적이어서 견뎌야 할 무엇에 불과하지 않은가. 자기주도적으로 열정적인 노동을 하는 근로자가 없지는 않지만, 많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이란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것이지 자발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p><p></p><p>무엇이 잘못된 걸까? 노동자인 나의 문제인가, 사회의 문제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노동 자체가 갖는 문제인가. 이에, 미국의 사회행동학 교수인 배리 슈워츠는 <우리는 왜 일하는가 : 오너와 직원 모두에게 필요한 질문>(배리 슈워츠, 문학동네 펴냄)에서, 일을 통한 자아실현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실패하는 이유는 단지 노동자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삶을 위한 ‘좋은 노동’이 실패하는 데엔 노동을 둘러싼 조건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으며, 일을 둘러싼 의미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책에서 소개한 사례를 보자.</p><p></p><p><strong>'역겨운 밥벌이'에 의미를 불어넣는 법</strong></p><p></p><p>대학 기부금을 독촉하는 전화 상담원 일을 하는 것은 구걸과 같이 역겨운 밥벌이로 흔히 여겨진다. 익명의 졸업생에게 전화해 뜬금없이 ‘돈을 내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실제 그 권유 전화의 성공률은 극히 낮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하는 자의 자존감과 관계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우리가 평소에 받는 텔레마케팅 수신 전화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생각해보자). 그런데, 책에서 전화 상담원 노동자에게 작은 동기를 심어주게 되었을 때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p><p></p><p>모두가 싫어하는 일에 대하여 그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상담원이 힘들게 조성한 ‘기부금 덕분에 인생이 바뀌게 된’ 장학금 수혜자 학생들이 직접 상담원을 만나, 당신의 전화 권유 결과 장학금을 받게 되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어 감사하다고 말한 것이다. 이를 경험한 전화 상담원들의 일하는 태도는 즉시 달라졌다. 장학금 수혜 학생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상담원 그룹과 비교해서 그 이야기를 들은 그룹은 시간당 더 많은 횟수로 전화를 걸었고, 기부금도 훨씬 더 많이 얻어냈다고 한다. 그들이 다른 상담원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 사례는, 일에 대해 우리가 의미와 목적의식을 갖는 것이 일에서의 만족감과 결과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시사한다.</p><p></p><p>나아가, 저자는 의사, 변호사, 교육가, 다른 전문직 종사자들이 일의 의미를 더 쉽게 발견할 수는 있지만, 건물 관리인, 공장 노동자, 미용사, 전화 상담원도 똑같이 그 의미와 만족감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일을 하는 방식에서 노동자가 재량권을 갖고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며, 오히려 경영자가 제시하는 인센티브나 업무 매뉴얼은 일의 만족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p><p></p><p>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을 인센티브나 매뉴얼로 통제하는 데에서 일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일의 만족감을 없애고 노동자를 타성에 젖게 만든다. 이러한 주장이, 고도로 분업화된 현대 기업 조직에 들어맞는지는 쉽게 판단하지 못하겠다. 오로지 노동자의 자율성만을 극대화시키고 그에 따른 책임을 전혀 묻지 않는다면, 관료 조직에선 이른바 ‘프리 라이더’가 양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p><p></p><p>하지만 저자의 끈기 있는 주장은, 인간이 원래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한다는 ‘성악설’을 배척하고, 미완성 동물로서 인간은 사회 제도에 따라 그 본성 역시 발명될 수 있다는 ‘성선설’로 이어진다. 결국, 일을 다르게 조직하면 근로자들이 자신의 일에서 만족감을 얻을 수 있고 회사의 수익도 개선된다는 것이다.</p><p></p><img src="https://sy9rz9r4oqrpzyzy.public.blob.vercel-storage.com/2021061409531648283_l-1.jpg" alt=null title=null/><p><em>▲이나모리 가즈오의 <왜 일하는가>, 그리고 배리 슈워츠의 <우리는 왜 일하는가></em></p><p></p><p><strong>‘왜 일하는가’에 대한 두 가지 답</strong></p><p></p><p>비슷한 제목을 갖는 두 책은 상이한 관점에서 쓰여 있다. 경영의 신이 쓴 <왜 일하는가>는 한 때 노동자였지만 이제는 성공한 기업가가 후배 노동자들에게 잠언을 들려주고 있다면, 사회학자의 <우리는 왜 일하는가>는 공동체에서 일을 통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구성원 모두를 위한 해법을 제시한다. 경영의 신은 ‘힘들고 어려워도 일은 꾹 참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회학자는 ‘일은 처음부터 자기실현의 싹을 갖고 있으며, 우리의 선한 마음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p><p></p><p>왜 일하는가, 정해진 답은 없다. 다만, 우리가 오직 돈 때문에 일한다는 답을 스스로 한다면 이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p><p></p><p>"급여가 없다면 당연히 우리는 일을 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우리가 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그 사람은 돈 때문에 거기에 다녀'라고 말하는 경우, 우리는 그냥 사실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왜 일하는가> p. 13)</p><p></p><p></p>]]></content:encoded>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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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t;요즘 애들&gt;, 회사에서 벌어지는 사도-마조히즘의 극사실주의 &apos;노동 소설&apos;</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210424-838446</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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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4 Apr 2021 00:50:18 GMT</pubDate>
      <description>계간 &lt;창작과 비평&gt; 2021년 봄호에 실린, 박상영의 단편소설 &apos;요즘 애들&apos;을 읽었다. 소설을 읽으며 과거 회사 생활을 계속 떠올렸고, 지나치게 감정이입이 되어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계간 <창작과 비평> 2021년 봄호에 실린, 박상영의 단편소설 '요즘 애들'을 읽었다. 소설을 읽으며 과거 회사 생활을 계속 떠올렸고, 지나치게 감정이입이 되어 읽는 게 조금 힘들 정도였다. 이 소설 역시 나는 새로운 '노동 소설'로 분류할 수 있고, 그렇게 볼 때 더 정확한 독서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같은 책에 실린, 한영인의 문학 평론 '우리 시대의 노동 이야기'는 지금의 노동소설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어 함께 읽을 만하다).(☞ 바로 가기 : <a target="_blank" rel="noopener noreferrer" class=null href="https://magazine.changbi.com/quarterly/category/changbi/" title=null><창작과 비평> 2021년 봄(통권 191호)</a>)</p><p></p><p><strong>C매거진 인턴 생활</strong></p><p></p><p>황은채와 '나'는 대기업 계열사인 'C매거진'의 인턴 생활을 함께했던 동료다. 이들은 C매거진을 퇴사하고 '나'는 한 방송국의 정규직 기자가, 황은 미디어 프로덕션의 유튜브 담당 팀장이 되었다. 이들이 몇 년 만에 만나 같은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재회하게 되었고 '나'는 황과 함께한, 사회 초년생 시절의 뜨거웠던 C매거진에서의 인턴 경험을 회고한다.</p><p></p><p>C매거진 역시 보통의 회사만큼이나 그들에게 열정노동을 요구했다. 문제는 회사의 상사들이었는데, 특히 문제된 이가 있었다. 불과 서너 명 남짓이 근무하는 잡지 회사에서 그들에게 가장 가혹한 인물이 바로 위 상사인 '배서정'이었다. 그는 업무 지시의 외피를 둘렀지만, 실상은 직장 내 괴롭힘에 가까운 언행을 황과 나에게 일상적으로 행하는 인물이다. 멀리서 보면 그 업무 지시는 정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나'와 황의 여건을 고려하지 않는 폭력적인 것이었으며, 자기 기분에 따라 막말을 일삼는 것이었다. 배서정이 이들에게 추궁할 때 자주 쓰는 말이 "네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봐"란 말이다. 느닷없는 자기반성과 당혹을 부르지 않을 수 없다. 급기야 황은 배서정의 폭언에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몰래 진료를 받는 지경에 이르고, '나' 역시 배서정의 직장 내 괴롭힘에 폭발하여 마지막 항의를 하고 장렬히 퇴사한다.</p><p></p><p><strong>조직의 밑바닥, 인턴의 노동 조건</strong></p><p></p><p>근로계약을 체결한 모든 근로자는 '사용자-근로자'의 계약 관계에 더하여, 중첩적으로 근로자들 사이의 위계 관계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 근로자들 사이의 위계에 기반한 노동의 분배(누가 어렵고 힘든 일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는 필연적으로 긴장과 폭력이 작용하는데, 이때 가장 큰 피해자는 위계의 밑바닥에 속한 신입 인턴이나 비정규직들이다(실제 화이트칼라 세계에선 사용자-근로자보다 근로자들 사이의 갈등이 더 자주 벌어진다).</p><p></p><p>컨베이어벨트 위에서 부품과 함께 서 있는 블루칼라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위계를 뚜렷하게 자각하고 그에 맞춰 자신의 신체를 기계화한다. 화이트칼라 역시 조직의 위치 안에서 분배받은 일을 기계적으로 처리해야 할 때가 있다. 황과 '나'와 같은 인턴은 아침엔 커피를 내리고, 오후 2시엔 반드시 트위터 맨션을 해야만 하고, 주기에 맞춰 화분에 물을 줘야 한다. 인턴들의 노동 안에는 주어진 정규 노동량에 더하여, 조직원들의 노동과 환경을 일상적으로 보조하고 관리해주는 추가 (돌봄)노동을 포함시켜야 한다. 과거 C. 라이트 밀즈가 지적한 것처럼, 인턴들이 정규/돌봄 노동에 상사들의 비위까지 맞추는 감정 노동을 더해야 한다는 현실을 보면, 화이트칼라 노동의 질은 블루칼라의 그것보다 더 떨어지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p><p></p><p>이러한 불평등한 노동 분배에 관여하거나 방조한 상사들 중엔 과거 노동 해방을 부르짖었음 직한 586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오히려 그들의 위선을 도드라지게 만든다.</p><p></p><p><strong>586들의 위선</strong></p><p></p><p>한때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적 올바름이, 지금 사적 영역에서의 옳음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C매거진의 편집장이 학생운동을 했음에도 폭력적인 사용자의 대리인이 되었고 '우리 가족'을 내세워 직원들을 공공연하게 노리개로 삼고, 방송국 롤모델인 남기자는 공채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하여 은근한 차별의 냄새를 풍기거나 느닷없이 부하의 사생활을 침해한다.</p><p></p><p>특히, 남기자는 과거 파업 얘기를 하며 가끔 울기도 하는데, 그것은 누구나 '예상 가능한 통증'을 딱 그만큼만 전시하는 것이 유효한 곳에서 하는 적정한 범위의 감정 표현이어서, 지옥 같은 인턴 경험을 했던 '나'에겐 생경하게 보인다. 남기자가, 해고된 비정규직의 집회를 보고 '나'에게 "쟤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 윗사람들이 나쁜 놈들이지"라고 말할 때,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p><p></p><p>이들의 '예상 가능한 통증의 범위'는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도래한 것이기도 하다. 편집장은 취업이 보장된 안정된 대학 시절, 정권 타도를 부르짖을 수 있었을 테고, 남기자 역시 정규직 직원 신분에 도덕적 우월성을 선점한 상황에서 파업을 낭만적으로 회고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아이러니는, 그러한 안락함 위에 스치듯 지나갔던 '이념'이 현재 이들의 비겁함에 대한 알리바이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한 때의 정의로움이, 그들로 하여금 황과 '나'를 '요즘 애들이란…' 말로 정리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있다.</p><p></p><p>이제 과거를 부정당하는 자들은 요즘 애들이다. 오직 요즘 애들만이 스스로 과거를 부정한다. 이들은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나아가지 못한 원죄를 숨길 수밖에 없는데, 중도 퇴사가 곧 '사회생활 못함'의 직접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C매거진의 인턴 경험을 말하는 것이, 지금 정규직이 된 회사 생활에도 손해가 됨을 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p><p></p><p><strong>회사, 사도-마조히즘의 세계</strong></p><p></p><p>가장 가혹한 상사였던 배서정은 원래부터 나쁜 상사였나. 배서정 역시 누적된 폭력에 적응한 사원일 뿐, 이 세계에 태생적 악인은 없다. 그녀는 지금도 편집장의 폭력적인 대화를 묵묵히 견딜 뿐인데, 그것은 스물셋에 입사해 18개월의 수습을 버틸 때 터득한 생존 기술일 것이다. 배서정은 실은 황과 나와 같은 인턴에서 정직원이 되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미리 보낸 노동자에 불과했으며, 그동안 감정과 생각을 잃고 C매거진과 편집장에 완전히 포섭되어 다시 황과 '나'를 괴롭히는 가해자-피해자인 인물이다. 편집장이 배서정을 갈구면 배서정이 황은채와 '나'를 괴롭히는, 사도-마조히즘의 세계는 이렇게 구성되었다. 이러한 폭력을 용이하게 만드는 구조는 그 폭력이 미치는 범위와 관계있다. 정규직인 '우리 가족' 안에서만 폭력은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C매거진 밖에는 무급에 가까운 인턴 기회라도 얻으려 하는 수많은 취업준비생이 존재하고, 방송국 밖에는 이곳에 진입하려는 산업예비군과 비정규직들이 역시 존재한다.</p><p></p><p>누가 가장 나쁜 놈인지, 어떤 놈을 타도해야 이 세계를 혁파할 수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야기 속에 우리들의 사장님, 사용자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사용자를 위해 일하는, 과거를 배반한 최상위 근로자 586들을 직접 볼 수는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사도-마조히즘의 세계를 만드는 데 일조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당연히 자기 반성을 해야 할 자는 인턴들이 아니라 편집장이고 586들이라면, 이제 인턴들은 자신을 숨기지 말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p><p></p><blockquote><p>"너희들이 뭘 잘못했는지 말해봐."</p></blockquote>]]></content:encoded>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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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책을 읽지 않는 자, &apos;애완인간&apos;이 될 것이니…</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210320-76388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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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0 Mar 2021 02:57:54 GMT</pubDate>
      <description>&apos;독서 문화의 진흥에 관한 기본적 사항&apos; &apos;독서문화진흥법&apos; 제1조 &quot;이 법은 독서 문화의 진흥에 관한 기본적 사항을 규정하여 국민의 지적 능력을 향상하고 건전한 정서를 함양하...</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rong>'독서 문화의 진흥에 관한 기본적 사항'</strong></p><p></p><p>'독서문화진흥법' 제1조 <br/>"이 법은 독서 문화의 진흥에 관한 기본적 사항을 규정하여 국민의 지적 능력을 향상하고 건전한 정서를 함양하며 평생 교육의 바탕을 마련함으로써,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고 국민의 균등한 독서 활동 기회를 보장하며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이바지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p><p></p><p>법률의 첫 번째 조항은 보통 그 입법의 목적이 선언되는 경우가 많다. 그 선언이 현실에서 실제 어느 정도 달성될 것인지는 조문의 장황함과 비장함과는 어떤 관계도 없지만. 가끔 어떤 법률이 내세운 제정 목적이란 마치 파산 기업의 분식회계와 같은 게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는데, 독서문화진흥법이 그렇다.</p><p></p><p>국가의 "독서 문화의 진흥"이 왜 필요한지, 과연 독서가 "국민의 지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인지, "건전한 정서"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독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와 같은 질문들은, '망해가는' 한국의 출판 시장과 환경 앞에서 너무 한가하게 들린다.</p><p></p><p>작년에 출판계를 뒤흔들었던 도서정가제(출판문화산업진흥법) 문제를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책은 교육, 학술, 문화 발전에 필수적인 공공재로서, 국가경쟁력과 직결되는 문화콘텐츠이기 때문에 시장가격이 아닌 공공재적 가격제도가 필요하다'는 선언 역시 공허하긴 마찬가지다.(☞ 바로 가기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a target="_blank" rel="noopener noreferrer" class=null href="https://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786959" title=null>[Q&A] 개정 도서정가제, 알기쉽게 풀어드립니다</a>')</p><p></p><img src="https://sy9rz9r4oqrpzyzy.public.blob.vercel-storage.com/2021031816085638044_l-1.jpg" alt=null title=null/><p><em>▲ 장강명이 쓴 <책, 이게 뭐라고>(아르떼 펴냄)과 <5년만의 신혼여행>(한겨레출판 펴냄)</em></p><p></p><p><strong>도대체 책을 왜 읽나</strong></p><p></p><p>이제 유튜브 독재가 만개한 한국에서, 책이라는 고루한 매체와 독서를 화제로 삼는 것은 그 자체로 고루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이게 뭐라고>(장강명 지음, 아르테 펴냄)는 '말하고/듣기'가 점령한 시대에, 소멸하고 있는 '읽고/쓰기'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나아가, 읽는다는 것이 국가경쟁력을 제고하거나 국민 개개인의 지적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한 어떤 질문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임을 나지막이 얘기한다. 이를테면, '좋은 삶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와 같은 주제를 놓고 맨 정신으로 친구와 토론할 때, 책은 가장 긴요하고 정확한 매체로써 기능할 수 있다.(<책, 이게 뭐냐고> 2장 '책을 잃는 일, 책에 대해 말하는 일' 중 '예비 장인이 예비 사위에게 하는 질문과 맨정신 토론')</p><p></p><p>작가 장강명은, 한 출판사가 진행하는 동명의 책 소개 프로그램 <책 이게 뭐라고>를 가수 요조와 함께 진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작가는 흥미로운 제작 뒷이야기와 더불어 자신의 독서 경험과 생각, 프로그램에서 만난 작가들과 (상상의) 독서 공동체에 대해 얘기한다. 특히, 제작팀은 그 자체로 훌륭한 독서 클럽이 되어 프로그램을 열정적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스프레드 시트를 통해 치열하게 사전 독서토론을 하던 에피소드가 인상 깊었다. 제작팀과 작가의 팀워크가 실제로 괜찮았던 만큼, 팀의 유쾌하고도 진지한 기운이 저자의 덤덤하지만 유머러스한 문체로 녹여져 <책, 이게 뭐라고>를 단숨에 읽히게끔 만든다.</p><p></p><p>책 전반을 통해 작가가 독자와 독서 생태계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은, 말하고 듣기가 닿을 수 없는 영역을 애써 지키고자 하는 그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에 더해 신문기자로 월급을 받고 살다가, 덜컥 전업 작가가 되어 인세로 생활하게 된 저자 자신의 생존 조건 역시, 읽는 것의 의미를 새삼 돌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p><p></p><p>작가의 이해관계를 떠나, 이 시대에 굳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떤 정보들은 책보다 비용 효율적으로 구글을 통해 얻을 수 있는데, 어떤 재미들은 유튜브를 통하는 것이 더 직접적이고 빠른데, 왜 굳이 책인가. 여러 답들이 있겠지만 이 무한 가속도의 시대에, 한가함을 품고 있는 책의 속성이야말로 독보적인 재미와 의미의 원천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말하자면, 책이야말로 가장 느린 매체이고, 그 느림은 어떤 다른 매체도 결코 이길 수 없는 근본적인 것이어서, 책을 통하지 않고선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p><p></p><p>그 느림은 틀림없이 우리를 의식·무의식적으로 사고(思考, 생각하고 궁리하는 것, 심상이나 지식을 사용하는 마음의 작용, 개념·구성·판단·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표준국어대사전))로 이끌 수밖에 없고, 끝내 책은 우리를 '가축화'로부터 방어하는 데 가장 정확한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장강명은 다른 에세이에서 '애완인간'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인간이란 자기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하는 순간부터 어른이 된다. (중략) 그러지 못하는 인간은 영원히 애완동물”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애완 인간이란, 학벌도 좋고 영어도 잘하지만 스스로 사표 낼 용기가 없어서 아버지가 대신 사직서를 내준 젊은 엘리트의 모습으로 대변된다.(<5년 만에 신혼여행>(장강명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중 'D-약 60일: 보라! 울트라 괴기 시리즈와 모험을 벌여야 할 때') 거칠게 말하자면, 읽지 않는 자 모두가 애완인간이 된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책을 읽으면서도 애완인간이 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p><p></p><p><strong>SNS의 댓글은 명예훼손죄로 처벌이 가능</strong></p><p></p><p>이 유쾌하고 진지한 책에서 나에게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작가 스스로 자신의 최근 병력을 솔직하게 공개하는 장면이었다. 그가 병증의 원인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다. 담담하게 고백하긴 했지만, SNS를 통해 작가로서 견디기 어려운 악담을 들었던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수 있겠다.(그 '악플러'들에 대한 분노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한 가지 조언으로, DM은 처벌하기 어렵지만 공개된 댓글은 명예훼손의 소지가 있다는 점을 꼭 알리고 싶다.) 내게는 그의 발병이, 읽고 쓰는 인간이었던 저자의 원래 모습과, 어느 정도는 강요되었던 말하고 듣는 겉모습 사이의 틈이 초래한 비극으로 느껴졌다.</p><p></p><p>그렇다면 작가는, 이 한 편의 매력적인 에세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온몸으로 구현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읽고 쓰는 사람은 결국 읽고 써야 한다.</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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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 국적 유부녀 레즈비언이 잘사는 방법</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210123-65380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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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2 Jan 2021 23:08:32 GMT</pubDate>
      <description>&apos;아름답다&apos;는 단어는 아름답다. 고교 시절 존경하는 은사님께 이 말의 어근을 들은 적이 있다. 선생님의 설명은 &apos;아름&apos;이란 말이 &apos;나&apos;라는 뜻을 가지므로 아름다운 삶이란 곧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아름답다'는 단어는 아름답다. 고교 시절 존경하는 은사님께 이 말의 어근을 들은 적이 있다. 선생님의 설명은 '아름'이란 말이 '나'라는 뜻을 가지므로 아름다운 삶이란 곧 나다운 삶이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 말은 부정확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나는 여전히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왜곡된 뜻을 더 좋아한다.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려는 열아홉 우리들에게 '아름답게 살아라, 바로 너답게'라는 말은 얼마나 근사한가.</p><p></p><p>하지만, 나답게 산다는 것이 간단치 않다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깨닫게 된다. 누가 불혹과 지천명을 말하는가, 인생을 살아갈수록 오히려 그 답은 찾기 어려워진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사는 대로 생각하다 보면 사회적 요구와 의무에 강요당하며 자신을 잃는 삶이 예정되어 있다. 특히나 표준적인 삶, '정상의 삶'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는 듯이 구는 한국 사회에서 아름다움을 찾기란 얼마나 어려운지.</p><p></p><p><strong>레즈비언으로서, 나다운 삶</strong></p><p></p><p><언니, 나랑 결혼할래요?>(김규진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를 '아름다운 삶'을 위한 투쟁으로 읽었던 것은, 이 땅의 성소수자로서 나답게 살기 위한 저자 부부의 경쾌하지만 우직한 의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레즈비언 에세이'가 경쾌한 것은, 작가가 원하는 레즈비언으로서의 일과 사랑을 삶 속에 정확히 구현하고자 하는 일상의 전략 때문이기도 하다. 그 전략은 투쟁적이지만 부드럽고 단호하지만 유연하다.</p><p></p><p>이 책의 제목 역시, 왠지 도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귀엽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내가 보기에 저자가 주장하는 자신의 귀여움(?!)이 제목에도 반영된 것 같은데, 책날개의 저자 소개는 이렇다.</p><p></p><blockquote><p>"한국 국적 유부녀 레즈비언. 왜 아무도 레즈비언으로 잘사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지 궁금해하다, 그냥 제 이야기를 공유하기로 했습니다."</p></blockquote><p></p><p>소제목들 역시 내용의 대강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직설적이다. '1. 레즈비언이지만 잘 살고 싶습니다. 2. 우린 오늘 결혼하지만 혼인신고는 거절당할 거야. 3. 해보기 전엔 모르는 거야.' 작가는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고 중언부언하지 않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정직하게 스스로를 내어 보인다. 어설펐던 첫 커밍아웃부터 500번의 커밍아웃을 거친 후 프로 커밍아웃러가 되기까지, 그래서 이제 자못 경쾌한 커밍아웃 기술을 후배들에게 소개하고 회사에서도 몸쪽 꽉 찬 직구와도 같은 커밍아웃 이후, 레즈비언 커플로서 6일간의 결혼 휴가와 축의금을 받아 내기까지, 그 여정이 너무 상쾌하다.</p><p></p><img src="https://sy9rz9r4oqrpzyzy.public.blob.vercel-storage.com/2021012222544511229_l-1.jpg" alt=null title=null/><p><em>▲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김규진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위즈덤하우스</em></p><p></p><p>이쯤 되면 저자의 캐릭터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소수자 운동의 전사로 느껴질 법하지만, 스스로를 '보수적인 유교 레즈비언'이라고 선언하며 독자의 편견을 깬다. 작가는 은근히,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갖는 이성애자의 비율만큼 동성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뿐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 책은 억압적인 한국 사회에서 겨우 살아가고 있을 성소수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목적과 함께, 성소수자에 대해 노골적인 편견과 은근한 혐오를 갖고 있는 이성애자들에게도 부드러운 교정의 기회를 주기 위해 쓰였을 것이다. '보통 시민으로서 레즈비언'을 강조하는 것은 그러한 전략의 일환일 것이다.</p><p></p><p><strong>PPT 프러포즈와 악플러 고소 사이</strong></p><p></p><p>작가는 일과 사랑을 자신답게 쟁취하기 위해 애쓰는데, 여러 에피소드 중 저자의 귀여움과 기백을 보여준, 인상적인 두 장면이 있다.</p><p></p><p>그는 자신의 귀여움이 가볍지 않음을, 연인에게 프러포즈를 PPT 기획서로 하는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동성 결혼 허용 국가에서의 혼인신고 절차를 안내하고, 결혼 후 상호 책임을 위한 서류 작성의 종류를 일별한 후, 동거에 필요한 정량적·정서적 요소들을 나열한다. 공동 대표 법인 설립, 특별 연고자 상속 재산 분여부터 가족 마일리지 합산, 수술 시 보호자 동의까지 리서치를 해 두었으니 정말이지 섬세하고 사려 깊은 결혼 제안서가 아닐 수 없다(결혼을 염두에 둔 독자라면 적극 따르고 본받을 만하지 않은가).</p><p></p><p>그의 용기와 주도면밀함은 인터뷰 기사에 달린 악플에 대처하는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세 건의 기사에 달린 댓글 1만2000건 중 일부를 분석하여 그 내용을 분류하고, 혐오 댓글과 다른 기사에 단 댓글을 비교하여 악플러들의 성향을 파악한다. 이 작업은 저자가 이들을 고소하기 위한 사전 정비작업이자 고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이후 변호사를 선임해 고소를 진행하고 일부에겐 사과까지 받아낸다. 이것을 기백, '진취적이고 씩씩하며 굳센 기상을 지닌 정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달리 뭐라고 할 수 있을까.</p><p></p><p><strong>가장 보통의 삶을 응원한다</strong></p><p></p><p>저자 부부가 성소수자이지만 이성애자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공장식 웨딩'을 스스로 선택하고, 무사히 식을 치러내는 장면에선 왠지 모를 통쾌함이 느껴진다. 이들 부부의 성별이 같음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성 커플들의 일과 생활, 취향에서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보통'의 두 와이프를 막는 것은 그들 내부가 아니라 그들 외부에 엄연히 존재한다. 구청에 했던 그들의 혼인신고가 반려되는 장면이 그 경계를 명확히 드러낸다.</p><p></p><p>이 반려 처분을 가능하게 한 논리를 우리 민법 교과서에서 확인해보면 이런 구절이 발견된다.</p><p></p><blockquote><p>"혼인은 남녀 간의 단순한 성애에 기한 결합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정당하다고 시인되고 동시에 법질서에 의하여 승인된, 양성의 생활공동을 목적으로 하는 결합으로, 대표적인 가족법상의 법률행위(계약)이다. 따라서 법적 승인 없이 혼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법적 승인이 있음으로써 혼인은 비로소 다른 비정상적인 남녀관계와 달리 법에 의하여 보호된다."(<민법강의>(지원림 지음, 홍문사 펴냄, 2009), 최신판에는 이 서술이 조금은 바뀌어있을지 궁금하다.)</p></blockquote><p></p><p>이들이 부부로 인정되지 못할 이유란 도대체 무엇일까. 프랑스의 시민연대계약(결혼 제도를 통하지 않고 이성뿐만 아니라 동성 간에도 준가족적 지위를 보장하는 사회계약) 같은 진보적 제도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나는 우리 법 테두리 안에서도 이들을 옹호할 근거를 찾고 싶다.</p><p></p><p>그리하여, 현재 우리 법의 적극적 해석으로도 이들의 부부로서의 지위가 인정될 수 있다고 주장해본다. 법원은 법률혼이 아닌 사실혼 역시 제한적으로나마 보호하고 있으며, 그 성립 요건으로 두 가지만을 들고 있는데, "주관적으로 사실상의 혼인 의사의 합치가 있어야" 하고 "객관적으로 당사자 사이에 사회관념상 부부 공동 생활이라고 인정할 만한 사회적 실체가 상당 기간 계속되거나 지속이 예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요건이 그것이다. 이들은 이미 사실혼의 요건을 모두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보통의 이들 커플의 행복을, 보통의 방식으로 빌어주지 못할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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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pos;김부장들&apos;에게 노동의 윤리를 묻다</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201212-42054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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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12 Dec 2020 00:23:16 GMT</pubDate>
      <description>소설가 김금희의 2018년 작 &lt;경애의 마음&gt;(창비 펴냄)을 거칠게 요약하면, &apos;과거의 상처를 공유하는 상사와 부하가 그 상처를 견디며 살아내고, 함께 일하다가,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소설가 김금희의 2018년 작 <경애의 마음>(창비 펴냄)을 거칠게 요약하면, '과거의 상처를 공유하는 상사와 부하가 그 상처를 견디며 살아내고, 함께 일하다가, 결국엔 사랑할 수 있게 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동안 이 작품에 대한 많은 리뷰들은 '상처'나 '살아내기', '사랑', 마음 같은 것들에 대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인물들의 '노동'에 더 많은 눈길이 갔고, <경애의 마음>을 '화이트칼라 노동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p><p></p><p><strong>조직에서 아웃사이더가 되는 방식</strong></p><p></p><p>경애와 상수는 1953년 설립된 후 미싱기를 만들어 판매하는 반도미싱이라는 '보수적인 분위기'의 회사 근로자들이다. 이들은 회사와 동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실패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경애는 노조의 파업 과정에 적극 참여하던 중 회사와 노조 양쪽의 비난을 받게 된 인물인데, 좌천성 인사로 홍보부에서 총무과로, 총무과에서 다시 영업부로 전보되어 팀장인 상수와 함께 일하게 된다. 상수 역시 경애만큼이나 회사에서 아웃사이더로 취급되는 자로서, 전직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의 '빽'으로 입사했다는 오명 아래 이렇다 할 실적이 없는 무능한 영업사원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p><p></p><p>상수의 경우 그의 무능함은 실적의 문제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일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정상적'인 영업사원의 방식-여자가 있는 술집에 가기, 물품계약서를 '가라'로 작성하는 융통성의 발휘, 중간관리자들에게 뒷돈 챙겨주기,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기-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열심히 일하는 '비정상'이 그를 회사 바깥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이러한 배제는 그와 경애에 대한 베트남 전보 발령으로까지 이어진다.</p><p></p><p>공포의 외인구단처럼 묘사되는 세 명의 영업팀(기술자 '조선생'이 합류한다)이 베트남에서는 '성공'할 수 있을까. 영화와 달리, 상수 팀의 일관된 영업 방식은 같은 회사의 김부장에게 중요한 거래처를 빼앗기는 등 '실패'를 거듭한다.</p><p></p><p><strong>작가가 묻는 노동의 윤리</strong></p><p></p><p>마치 실패가 예정된 것처럼 보이는 이 방식이란 무엇인가. 상수에게 일하는 방식이란, '묵묵히 맡겨진 주된 일에 임하는 주임(主任)의 의무를 다하는 자세'를, 계산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믿으며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 태도는 김부장들이 적당한 부패와 거래로 회사의 인정을 받는 방식, '잿밥이랑 줄서기'를 내세우는 정치적인 방식의 정반대에 위치한다. 그래서, 상수는 베트남 오지 거래처를 직접 찾아가고 그들의 어려움을 마음으로 해결해주는 방식을 견지해내고, 결국 실패하는 것이다.</p><p></p><p>상수와 경애가 끝내 지키려 하는 노동의 태도는 '상품은 팔되 인격은 팔지 않는다'는 선언과 맞닿아 있다. 임금에 대한 대가로 성실하게 노동을 제공하지만 회사가 실제로 요구하는 실적과 질서에는 무감하게 반응하는 어떤 태도가 그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노동 윤리는 회사와의 불화를 내재하고 있다. 회사의 윤리란 상사가 업무 지시를 하면 그 정당성을 떠나 그것을 수행하는 것, 업무와 무관하게 노래를 시키더라도 웃는 얼굴로 노래하고, 사장과 말없이 탁구를 치는 것이기 때문이다.</p><p></p><p>결정적으로 상수와 경애는 모두 '더딘 속도'의 인물이다. "모든 이가 따라야만 한다고 종용되는 표준적인 일상의 패턴을 기준으로 삼을 때, 더디게 가는 이"로서 "처음부터 목표가 정해져 있는 직선 같은 삶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 대신에 눈앞에 놓인 사건의 덩어리를 상대하고 조각해가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자들이다(양경언, 문학동네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이 소설을 새로운 노동소설로 보는 것은, 작가의 '더딘 인물'이 다양한 상수들로 변주되며 일관된 문제의식을 보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말하자면 상수는 '조중균'(<조중균의 세계>)과 '필용'(<너무 한낮의 연애>)에게 연결되어 있다(어떤 이유에서든 회사와 불화하는 이들은 작가의 소설들을 읽으며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p><p></p><img src="https://sy9rz9r4oqrpzyzy.public.blob.vercel-storage.com/2020121116310907493_l-1.jpg" alt=null title=null/><p><em>▲ <경애의 마음>(김금희 지음, 창비 펴냄). ⓒ창비.</em></p><p></p><p><strong>전보 명령과 명예훼손의 문제</strong></p><p></p><p>마지막으로, 작품 속 몇 가지 법률적 문제들을 살펴보자. 먼저, 이야기 전환의 계기가 된 전보 명령의 경우, 회사가 부장을 통해 상수로 하여금 베트남으로의 이동을 명령한 것은 근로 장소의 변경에 해당하는 배치 전환으로써 경영권 행사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인사명령에 대해 근로자는 순응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사용자는 채용, 배치, 이동, 고과, 승진, 해고 등의 인사권을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행사할 수 있지만, 나름의 한계를 갖는다. 이를 규정하는 조항이 바로 근로기준법 제23조다.</p><p></p><blockquote><p>제23조(해고 등의 제한) ①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 휴직, 정직, 전직, 감봉, 그 밖의 징벌(懲罰)(이하 "부당해고등"이라 한다)을 하지 못한다.</p></blockquote><p></p><p>우리 법원은 전직의 '정당한 이유'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회사의 업무상 필요성'과 '근로자의 생활상 불이익'을 비교하여 판단하는데, 상수와 경애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베트남 전보 명령을 받았을 때엔 이들의 생활상 불이익이 회사의 업무상 필요성보다 더 크게 인정될 것이다. 다만, 소설에선 상수가 전보 명령에 동의하는 것으로 그려지므로 부당 전보는 문제되지 않는다.</p><p></p><p>어색한 법률용어가 사용된 장면은 있다. 상수가 동료 직원의 맞선 현장에 찾아가 소동을 일으키고 주선한 거래처 사장에게 찾아가 욕설을 퍼부은 사건에서 거래처 사장이 상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은, 고소를 하더라도 사실관계 자체로 구성요건에 해당하지(죄가 되지) 않는다. 그의 행위가 자세히 설명되지 않았지만, 단지 맞선 현장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것은 (허위)사실의 적시라는 죄의 요건에 맞지 않고, 거래처 사장에게 욕설을 한 것 역시 모욕죄의 여지는 있지만 명예훼손에 해당하진 않기 때문이다(p. 13). 이것을 결정적인 서술의 오류라고 볼 순 없을 것 같고 문학적 허용 범위 안에 있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하지만, 이어지는 상수 어머니의 고소 취하를 위한 노력과 함께 읽으면 법률적인 어색함이 드러난다고 지적할 수는 있겠다.</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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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당신이 선택한 자살은, 당신의 &apos;죽음&apos;만을 의미하지 않는다</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201128-369201</link>
      <guid isPermaLink="true">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201128-369201</guid>
      <pubDate>Sat, 28 Nov 2020 02:28:15 GMT</pubDate>
      <description>죽음의 이미지 죽음을 떠올릴 때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다. 베트남 전쟁 중 AP 통신사 기자가 촬영한 사진 &apos;사이공식 처형&apos;이다. 처형되는 자가 실은 일가족 7명을 죽인 혐의를...</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rong>죽음의 이미지</strong></p><p></p><p>죽음을 떠올릴 때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다. 베트남 전쟁 중 AP 통신사 기자가 촬영한 사진 '사이공식 처형'이다. 처형되는 자가 실은 일가족 7명을 죽인 혐의를 받았던 악명 높은 베트콩이었다는 사실이 이 사진의 감동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곧 닥쳐올, 그러나 절대 원치 않았을 죽음을 앞두고 있다. 찡그린 눈과 일그러진 입, 힘이 들어가 조여든 목 근육과 긴장되어 오그라든 몸은, 임박한 죽음을 날것으로 전달해준다. 우리 역시 화면 가장자리의 목격자와 같은 심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단말마적 장면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p><p></p><img src="https://sy9rz9r4oqrpzyzy.public.blob.vercel-storage.com/2020112720543274426_l-1.jpg" alt=null title=null/><p><em>▲ 에디 애덤스 AP통신 사진기자 1968년 2월 1일 베트남 전쟁 중 사이공에서 촬영한 '사이공식 처형' 사진. ⓒ구글</em></p><p></p><p>우리 모두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지만 죽음 직전을 느닷없이, 이만큼 명징하게 경험하지는 못한다. 언젠가는 닥쳐올 운명을 외면한 채 무감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다. 어떤 소설가의 말을 빌리자면, 죽음은 지금은 없지만 아주 없지는 않은 무엇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끝내 외면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는 대로 생각하는 우리의 관성 때문일까, 그저 먹고 살기 바쁘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삶 자체를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일까.</p><p></p><p><strong>자살의 이유들</strong></p><p></p><p>조수경의 소설 <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한겨레출판 펴냄)는, 그렇게나 피하고 싶은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작품의 인물들은 모두 삶의 마감을 기다리며 정해진 절차에 따라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을 '센터'에서 보낸 후 자살에 이르게 된다(작품의 배경은 한국의 가까운 미래로 보인다). 여기서 이들의 죽음은,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에 해당하는 존엄사나 치명적인 질병과 고통에 따라 행해지는 안락사가 아닌 '순수한 자살'임을 염두에 두자.</p><p></p><p>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서우는 이제 막 서른이 되었는데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 중퇴하고, 히키코모리로 살아오다 몇 차례의 자살 시도 끝에 센터에 입소한다. 주인공은 수년간 가족과도 말 대신 문자를 보내는 식으로 스스로를 유폐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곳 죽음의 센터에 와서야 친구들을 사귀고 말하기 시작한다.</p><p></p><p>기러기 아빠로 살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가장,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로 인해 오히려 죽음을 바라는 20대, 열정적인 젊음을 다 보낸 후 소멸밖에 남지 않은 생을 정리하려는 60대, 자기 인생의 전부였던 글쓰기를 할 수 없게 된 작가, 연이은 혈육들의 자살로 죽음의 DNA가 새겨져 있다고 믿는 룸메이트까지. 이들에게 나름의 사연은 있지만, 육체적 질병과 고통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정신적 고통만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존엄사나 안락사와 달리 취급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이들의 선택을 이해하고 마침내 긍정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인가? 오히려, 열심히 살며 인생을 향유하다가 어느 시점에 생을 마감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라고 스스로 결론 내렸다면, 이 결정을 비난할 수 있는 근거란 무엇인가?</p><p></p><img src="https://sy9rz9r4oqrpzyzy.public.blob.vercel-storage.com/2020112721013832132_l-1.jpg" alt=null title=null/><p><em>▲ <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조수경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em></p><p></p><p><strong>자살을 처벌한다는 것</strong></p><p></p><p>소설 속 센터에서 맞이하는 죽음의 장면은 이렇다.</p><p></p><blockquote><p>"의사가 한 여사님에게 약을 건넸다. 의료인이 주사를 놓는 것이 아닌 스스로 약을 삼키는 방식. 그것은 타인의 도움은 조금도 받지 않고 온전히 자기 의지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의미였다."(<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 186쪽)</p></blockquote><p></p><p>의료진은 그들에게 알약을 줌으로써 자살을 조력하고 있다. 소설의 근미래는 아마도 법을 개정한 상태를 가정했겠지만 현재 한국의 형법에 의하면, 불행하게도 약을 건넨 의사 역시 처벌받는다.</p><p></p><blockquote><p>형법 제252조(촉탁, 승낙에 의한 살인 등)</p><p>① 사람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어 그를 살해한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p><p>② 사람을 교사 또는 방조하여 자살하게 한 자도 전항의 형과 같다.</p></blockquote><p></p><p>자살의 방조에는 '타인이 자살함에 있어서 총이나 독약 등 자살 도구를 제공하는 유형적 방법과 고통 없이 자살할 수 있는 기술적 조언이나 정신적 격려를 해주는 무형적 방법'을 포함한다.(<형법 각론>, 임웅 지음, 법문사 펴냄) 하급심 판결 중 인터넷 자살 카페의 개설자가 가입 초대장을 발송하는 방법으로 회원을 모집한 후 자살 방법에 대한 정보를 교류하도록 한 행위를 자살방조죄로 판단한 경우도 있다.</p><p></p><p>자살방조죄에는 형법 이론상 특이한 면이 있다. 형법의 '공범종속성' 원칙을 깨기 때문이다. 공범종속성이란, 쉽게 말해 정범(흔히 말하는 '주범')이 처벌되지 않으면 공범(교사범, 방조범과 같은 '종범')은 당연히 처벌받지 않는다는 원칙이다(더 들어가면 공범의 종속 정도에 대해서도 복잡한 형법 이론이 펼쳐진다). 그런데, 위에서 본 자살방조죄의 경우 자살을 하거나 자살에 실패한 정범은 처벌하지 않는데, 그를 도운 종범, 교사범이나 방조범이 처벌되는 것이다(일부 이슬람 국가들은 자살미수범도 처벌한다).</p><p></p><p>한편, 이론적인 차원에서 자살 자체를 범죄로 볼 수 있을까. 자살 행위는 범죄가 아니라는 견해와 범죄라는 견해가 대립한다. 범죄가 아니라는 의견은 '인간의 생명을 개인이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는 법익'으로 이해하는 개인주의·자유주의 생명관을 바탕으로 한다. 반대로 범죄론자는 '생명은 개인이 자유로이 처분할 수 없는 법익'이므로 자살은 실질적으로 범죄이지만, 형사정책적 견지에서 처벌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죄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형법 각론> 인용)</p><p></p><p><strong>논리적일 수 없는 것, 인간적인 것</strong></p><p></p><p>어쨌든, 결국 센터의 의료진이 자살하는 자에게 '알약을 건네주는 행위'는 그의 자살을 도운 것에 해당하므로 자살방조죄에 해당한다.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지만, 이 작품에 자살에 성공하는 자는 많지 않다.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한 여사'가 생의 마지막 날 열었던 파티다. 자살 직전 칵테일 파티를 여는 것이 정신 나간 짓이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어쩌면 자살이 적어도 수동적인 선택만은 아니라는 것, 삶이라는 과정에서 축제처럼 적극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삶의 정확한 마침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닐까. 한 여사는 마지막 가는 길에 백합으로 꾸며진 옥상을 통과한 후, 약을 먹곤 '향기 참 좋네' 하고 잠꼬대처럼 낮게 중얼거리고 웃으며 잠이 든다.</p><p></p><p>ps. 어떤 균형감을 위해 정영수의 단편 소설 <더 인간적인 말>(2018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펴냄)도 함께 읽어보자. 이 작품 역시 건강한 이모의 '순수한 자살'을 다루지만 자살 주변인의 혼란과 남겨진 자의 고통을 돌아본다는 점에서 앞의 작품과 차별점을 갖는다. 이 작품의 해설에서 안지영 평론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p><p></p><blockquote><p>"애당초 죽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논리적이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 심연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자리한다. 법적·도덕적 책임과 무관하게 다른 생명체의 죽음에 대해 느끼는 구체적인 책임 의식, 혹은 연대 의식이 바로 죄책감의 정체는 아닐까. 한 사람의 죽음은 '그의' 죽음인 것만은 아니다. (중략)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해,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음에 대해, 그리하여 우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부단히 '인간적이고자' 하는지에 대해 (말해야 한다)"</p></blockquote><p></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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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소설 속 법률적 오류를 톺아보다</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201114-188145</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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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14 Nov 2020 01:15:08 GMT</pubDate>
      <description>형사 소송 절차와 내용이 최근 한국 소설에서 이전보다 자주 등장하는 것은, 신문 보도에서 재판이 사회면을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현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사회적 갈등들이...</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형사 소송 절차와 내용이 최근 한국 소설에서 이전보다 자주 등장하는 것은, 신문 보도에서 재판이 사회면을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현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사회적 갈등들이 시민들의 토론 등으로 해결되기보다 결국 법적 쟁송으로 비화된다는 것인데, 이것이 좋은 현상일까?) 어찌 되었든 최근에는 장르 문학이 아닌 이른바 순수 문학에서도 형사(소송) 절차나 개념이 훨씬 더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 같다. 문제는 소설 속에서 사용되는 법률 용어나 용례, 개념의 정확성이다. 문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일부 내용에서 발견된 법률적 오류를 바로잡는 것은 의미있을 것 같아 문학 애호가의 입장에서 몇 가지 사례를 정리해보았다.</p><p></p><img src="https://sy9rz9r4oqrpzyzy.public.blob.vercel-storage.com/2020111322014900612_l-1.jpg" alt=null title=null/><p><em>▲ <9번의 일>(김혜진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밤이 지나간다>(편혜영 지음, 창비 펴냄), <최단경로>(강희영 지음, 문학동네 펴냄).</em></p><p></p><p></p><p><strong>김혜진 <9번의 일></strong></p><p></p><p>대기업 노동자가 권고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아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소재로 한 김혜진의 <9번의 일>(한겨레출판 펴냄)은, 격동의 80년대 이후 등장한 '2019년의 노동소설'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의미와 재미가 있는 소설이다(이 감상을 포함하여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평가는 오로지 나의 주관적인 생각과 느낌일 뿐이지만).</p><p></p><p>통신설비 보수 등의 일을 하던 주인공은 회사의 명예퇴직을 받아들이지 않고 몇 차례 인사발령을 받다가, 급기야 회사와 지역 주민이 '혐오시설'의 건설로 인해 대치하고 있던 작업장에까지 배치를 받고 일하게 된다(말하자면 사직을 강제하기 위한 징계성 배치전환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즈음, 소설 속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던 장면에서 작가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p><p></p><blockquote><p>"회사는 주민들의 벌금 일부를 감면해주는 것으로 도의적인 책임을 졌다."(<9번의 일> 236쪽)</p></blockquote><p></p><p>회사의 환경 유해 시설 건립에 맞서 싸우던 일부 주민들은 자신들의 형사상 불법행위에 따라 처벌받게 되었고 이후 법원의 판결에 따라 벌금형이 내려졌는데, 여기서 회사가 '주민들의 벌금 일부를 감면'해주었다고 서술한 것이다.</p><p></p><p>일단 저자는 민사 절차와 형사 절차를 혼동한 것 같다(작가들이 하는 가장 흔한 실수로 민사상 '피고'와 형사상 '피고인'을 혼용해서 쓰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의 실수라고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형사절차에서 범죄의 피해자는 범죄자가 국가에 납부하는 벌금에 대하여 어떠한 처분권도 갖지 못한다. 따라서, 범죄의 피해자였던 회사가 국가에 내는 벌금을 '감면'해주는 것 역시 현실에선 불가능한 것이다.</p><p></p><p>이는 범죄의 피해자가 법원으로부터 선고받은 가해자의 징역형을 감면해줄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국가의 형벌 집행에 대하여 피해자의 의사표시는 법원의 선고 시 양형 사유로 기능할 수는 있어도, 법원의 최종 판결에 대한 처분권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사실이 이 소설에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작가 역시 정확한 취재 없이 위 장면을 서술한 것 같다.</p><p></p><p>이와 같은 절차의 혼동은, 아래 소설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나타난다.</p><p></p><p><strong>편혜영 <밤이 지나간다> 중 <밤의 마침></strong></p><p></p><p>편혜영의 소설집 <밤이 지나간다>(창비 펴냄)에 수록된 <밤의 마침>이란 단편은, 주인공이 실제로는 강제추행죄를 저지른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수사기관을 속이고 자신의 거짓된 결백을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히려 피해자를 무고죄로 고소하는 이야기다. 결국 진실과는 달리 성추행을 당한 실제 피해자가 무고죄로 처벌을 받을 무렵, 검사는 주인공에게 '무고죄까지 가지 말고 적당히 합의하라'는 조언을 하게 되는데, 그는 제안을 거부하고 "벌떡 일어나 검사에게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온다". 이어서 문제의 대목이다.</p><p></p><blockquote><p>"기어이 벌금을 다 받아냈지만 그 돈으로 카메라도, 시계도 사지 않는다. 아내에게도 선물하지 않는다."(<밤이 지나간다> 48쪽)</p></blockquote><p></p><p>작가는 범죄자가 형벌로 부과된 벌금형에 따라 벌금을 납부하면 그것이 곧바로 범죄 피해자(실은 성추행범이지만 무고죄로 진짜 피해자를 고소하여 벌금을 '받아내려' 한 주인공)의 계좌로 입금되는 것을 전제로 해서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본 것처럼 피해자가 가해자의 벌금을 감면할 수 있다는 오류보다 더 큰 오류라고 하겠다. 앞서 본 것처럼 범죄 피해자가 납부하는 벌금은 국가에게 귀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p><p></p><p>작가는 소설에서 결정적인 사실관계를 잘못된 법률 지식에 따라 현실과 완전히 다르게 서술하고 있으며, 이 부분은 소설의 리얼리티를 크게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p><p></p><p><strong>강희영 <최단경로></strong></p><p></p><p>기성 소설가가 아닌 신인 작가의 소설에서도 법률적 오류가 발견되기도 한다. 제25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인 강희영의 장편소설 <최단경로>(문학동네 펴냄)에는 법률 용어의 오류가 있다.</p><p></p><blockquote><p>"그 사건이 일어난 후로도 그곳은 한동안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었다. 피의자의 항소이유 때문이었다. (중략) 그는 지난달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사고를 당한 독일인 유학생을 참고인으로 신청했다."(<최단경로> 102쪽)</p></blockquote><p></p><p>이 소설의 공간은 네덜란드이긴 하지만, 네덜란드의 수사와 재판 절차 등 형사소송에서의 흐름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2011년 <국외훈련검사 연구논문집>(제26집) '네덜란드 형사소송법상 피의자의 지위'(하재욱, 2011 <국외훈련검사 연구논문집>(제26집) 참조) 여기서 우리 형사소송법을 전제로 위 내용을 검토해보면, 본문 중에 "피의자의 항소이유"는 그 자체로 잘못된 용어다. 피의자는 검찰에 의해 기소가 되면 그 신분이 '피고인'으로 바뀌므로 "피고인의 항소이유"가 맞는 표현이다. 아직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를 받는 지위에 있는 피의자는 1심 재판에 대한 불복인 항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피의자의 항소이유는 법률상 '형용모순'과 같은 표현이다. 또한, 재판 절차에서 사건 관계인을 소환하여 신문할 때 그의 신분은 참고인이 아니라 증인에 해당하므로, 위에서 지적한 두 번째 문장은 우리 형사소송법상 '증인'으로 바뀌어야 옳은 표현이다.</p><p></p><p>이상 살펴본 세 소설에서 나타난 법률의 오류가 소설적 장치로써 어느 범위 안에서 허용되어야 하는지, 이른바 '문학적 허용'의 범위 내에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지적을 했다. 다만, 이 지적들이 작가들에게 상처만을 주는 것이라면 애호가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p>]]></content:encoded>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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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치인의 소송 남발과 &apos;명예&apos;의 의미</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201031-613296</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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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31 Oct 2020 01:18:19 GMT</pubDate>
      <description>명망 있는 변호사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카타리나 블룸이 댄스파티에서 만나 첫눈에 반한 한 남성과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카타리나는 즉시 체포되어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는...</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명망 있는 변호사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카타리나 블룸이 댄스파티에서 만나 첫눈에 반한 한 남성과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카타리나는 즉시 체포되어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는데, 그 남성이 강도범으로 쫓기던 루트비히 괴텐이었고 카타리나가 그를 숨겨주고 도주를 도와줬다는 혐의가 그녀에게 있었다. 동시에 언론 보도가 시작되었고, 평범했던 카타리나는 이제 평소 '신사들의 방문'을 받던 문란한 여성으로 둔갑돼 그의 평온했던 삶은 송두리째 파괴된다.</p><p></p><p>수사기관이 카타리나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파고들며 그녀를 괴텐의 공범으로 몰고 가려 하고, 유력 신문 <차이퉁(Zeitung)>(독일어로 '신문'을 뜻한다)은 검찰과 은밀하게 협력하며 선정적인 기사로 카타리나를 '은행 강도의 정부'이자 '빨갱이'로 몰아갔던 것이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왔던 카타리나는, 이제 오랫동안 힘겹게 쌓아온 '명예'를 잃어버리고 결국 차이퉁 기자를 살해하는 진짜 범죄를 저지른다.</p><p></p><p>노벨상 수상 작가 하인리히 뵐이 1974년 발표한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민음사 펴냄)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부제,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폭력'은 주인공 카타리나의 일상적인 평화를 몇 번의 왜곡 보도로 무자비하게 파괴해버린 <차이퉁(신문)>을 향하고 있다.<br/><br/></p><img src="https://sy9rz9r4oqrpzyzy.public.blob.vercel-storage.com/2020102610191394662_l-1.jpg" alt=null title=null/><p><em>▲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em></p><p></p><p></p><p><strong>1970년대 독일의 상황</strong></p><p></p><p>이 소설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작가가 겪은 경험과 당시 독일의 사회적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하인리히 뵐은, 1970년대에 테러를 주도하던 과격 단체 '바더-마인호프 그룹(이른바 적군파)'를 옹호하는 듯한 글을 당시에 썼고, 이를 계기로 우익 성향 독일 언론(극우 계열 신문 '빌트 차이퉁')과 대중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았다. 그즈음 카타리나의 모델이 된 하노버 공대 교수인 페터 브뤼크너가 적군파를 은닉한 혐의로, 하인리히 뵐보다 더 크게 고초를 겪었던 일화도 있다.</p><p></p><p>당시 지식인 그룹인 작가와 교수가 독일 우파 언론으로부터 당한 '폭력'이, 결국 이 소설을 탄생시킨 것이다. 하인리히 뵐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차이퉁>의 기자를 살해하도록 한 것은, 언론의 명예훼손이란 개인의 인격을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인격 살인에 대한 '정당방위'를 주장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결말 때문이었는지, 소설이 발표되었을 당시 작가가 언론을 향해 날린 '카운터 펀치'라는 식의 평가도 있었다고 한다.</p><p></p><p><strong>형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명예'</strong></p><p></p><p>어떤 개인이 언론에 의해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를 말하는가. 그것은 카나리나 블룸이 그의 명예훼손으로 어떻게 살인까지 하게 되었는지 규명하는 데 필요하다. 나아가, 주인공의 사례와는 반대로 한국에서 정치인들이 언론 보도에 명예훼손 소송을 지나치게 남발하는 현실은, '명예'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고민하게 만든다.</p><p></p><p>명예(名譽)란, 사전적으로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이름이나 자랑 또는 그런 존엄이나 품위를 일컫는다(<표준국어대사전> 정의). 개념적으로 '모든 명예'가 보호되는 것은 아니다. 형법 교과서에서 말하는 명예는 내부적/외부적 명예로 구분된다. 내부적 명예란, "자기 또는 타인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인간의 인격에 내재하는 진정한 가치로서의 명예"여서 "개개인 모두가 천부적으로 평등하게 지니고 있고, 외부로부터 침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형법상 보호의 객체가 될 수 없"다고 본다.(내부적 명예란 사상의 자유, '양심'과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더 잘 이해된다.) 이에 비해 외부적 명예란, "인격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평가'로서의 명예, 세평"이라고 할 수 있고, 형법이 보호하는 명예란 바로 이 외부적 명예를 가리킨다. 이와 별도로, "자기 자신의 '주관적 평가'로서의 명예"의 경우 명예감정으로 구별한다(<형법각론>(임웅 지음, 법문사)).</p><p></p><p>현실에서 유의미한 구분은 외부적 명예와 명예감정 사이에 존재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명예감정을 형법이 보호하는 외부적 명예와 착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명예에 둔감하게 또는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공적 인물을 각각 가정해 보자. 어떤 보도 기사가 전체적으로 진실한 것이지만 일부 허위를 담고 있는 경우, 어떤 정치인은 기사의 보도 방향과 논조를 이해하고 감당하겠지만, 자신의 '명예감정'에 매우 예민한 자는 이를 즉시 문제 삼을 것이다(이미 너무 많은 정치인들이 그렇게 한다). 이렇게 명예훼손이 개인의 '명예감정'에 좌우된다면 국가의 형벌권의 발동이 개인의 주관적 감정에 좌우되는 것이다(임웅, 같은 책). 형법이 보호하는 명예가 그러한 감정이 아니라 외부적 명예가 되는 이유이다.</p><p></p><p>외부적 명예란 결국 자기 자신의 주관적 평가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사회적 평가로서의 명예라고 할 때 우리 정치인들은 특히 자신의 명예감정을 왜곡하여 과대평가하고 있으며 이에 기반하여 소송을 남발하는 것은 아닐까.</p><p></p><p><strong>언론이 처한 환경</strong></p><p></p><p>이와 달리, 카타리나 블룸의 경우 <차이퉁>의 선정적 보도로 명예가 훼손당했다는 사실은 명백히 보인다. 빨갱이이자 강도의 정부로 알려졌지만 실제 그는 평범하고 성실한 시민이었을 뿐이며 차이퉁은 이를 날조했다. 이때 그의 명예는 인격이 파괴당하는 수준에 이르렀던 것이다. 스스로의 명예를 과대평가하는 어떤 공적 인물과 달리, 일개 시민에 불과한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는 보호 가치가 적은 것인가. 이 작품은 오히려, 공적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익명성과 소박한 일상은 그 자체로 존엄하며, 그것이 파괴되었을 때 더 심한 가해가 된다고 말한다.</p><p></p><p>소설은 명확하게 당시 언론 환경과 차이퉁 보도의 동기를 지적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소설의 맥락으로 현재를 보면, 우리는 이제 당시보다 더 뚜렷하게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할 수 있다. 언론은 본디 시장의 영역에 속해있으며 독자의 구독과 시장의 관심-광고가 이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2020년, 독일이나 한국에서의 언론 지면 구독자는 줄고 시장에서의 경쟁은 강화되고 있다. 언론 환경 변화의 중심에는 포털로 대변되는 온라인이 자리한다. 포털 플랫폼은 뉴스 생산 과정에서 독자와의 장기적 신뢰의 형성을 저하시키고, 대중의 즉각적인 욕구에 반응하는 저질 뉴스만 내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관련 기사 : <북저널리즘> '<a target="_blank" rel="noopener noreferrer" class=null href="https://www.bookjournalism.com/contents/5867/chapters/5893" title=null>포털에 종속된 저널리즘</a>' 중) 최종 진실이 아닌 조각난 사실들을 즉자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은, 소설 속 독일 사회에서보다 지금의 한국에 더 정확하게 맞는다.</p><p></p><p><strong>명예의 보호 vs 언론의 자유</strong></p><p></p><p>이 혼돈의 시대에 공적 인물들의 언론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 남발과 사인에 대한 언론의 무분별한 보도 사이에 어떤 균형점을 찾을 수 있을까. 그 균형은 시민들의 토론과 경험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우리 공동체를 위해 더 나을 수 있겠지만, 현재 법원이 도달한 결론은 이렇다.</p><p></p><blockquote><p>"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여론의 자유로운 형성과 전달에 의하여 다수의견을 집약시켜 민주적 정치질서를 생성, 유지시켜 나가야 하므로 표현의 자유, 특히 공적 관심사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중요한 헌법상 권리로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다만 개인의 사적 법익도 보호되어야 하므로, 표현의 자유 보장과 인격권 보호라는 두 법익이 충돌하였을 때에는 구체적인 경우에 표현의 자유로 얻어지는 가치와 인격권의 보호에 의하여 달성되는 가치를 비교형량하여 그 규제의 폭과 방법을 정하여야 한다. 타인에 대하여 비판적인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사정이 없는 한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표현행위의 형식과 내용이 모욕적이고 경멸적인 인신공격에 해당하거나 타인의 신상에 관하여 다소간의 과장을 넘어서 사실을 왜곡하는 공표행위를 하는 등으로 인격권을 침해하는 경우에는 의견 표명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난 것으로서 불법행위가 될 수 있다."(대법원 2018. 10. 30. 선고 2014다61654 사건)</p></blockquote>]]></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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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맥주병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때린 과장님</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sisain-20190730-3516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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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30 Jul 2019 03:01:00 GMT</pubDate>
      <description>내가 ㄷ 과장에게 맥주병으로 맞은 사건은 입사 3년 차에 일어났는데, 팀 회식에서 2차로 찾은 맥줏집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부하로서 충성을 맹세하는 척하며 호기롭게 술을 마시고, 세련된 아부와 함께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술자리는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농담 사이사이 업무상 부하가 가져</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내가 ㄷ 과장에게 맥주병으로 맞은 사건은 입사 3년 차에 일어났는데, 팀 회식에서 2차로 찾은 맥줏집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부하로서 충성을 맹세하는 척하며 호기롭게 술을 마시고, 세련된 아부와 함께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술자리는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농담 사이사이 업무상 부하가 가져야 할 태도를 얘기했던 것 같다. ‘직장 생활, 일 잘하는 것보다 태도가 훨씬 중요하다’ 이런 말이 오가다가 내가 별 반응이 없자, ㄷ 과장이 웃으면서 “이 자식아, 좀 잘해라” 하며 맥주병으로 가볍게 내 머리를 때렸다.</p><p>평소라면 “과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충성!” 하며 술을 다시 따랐겠지만, 웬일인지 그날 나는 병으로 한 대 맞은 뒤에도 침묵을 지켰다. 묵묵히 술만 마시자 주변인들도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술자리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내가 술자리에서 계획되어 있는 부하된 자의 ‘코드’대로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p><p> </p><img src="https://sy9rz9r4oqrpzyzy.public.blob.vercel-storage.com/35168_68690_5713.jpg" alt="" title=null width="600"/><p><em>ⓒ윤현지 그림</em></p><p>급하게 자리가 정리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그 밤, 잠을 자지 못했던 것 같다. 그날 침대에 누워 무엇을 느끼고 곱씹었던가? 어떤 모멸감이었는지, 아니면 분함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뒤늦게 화가 나거나 했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그나마 ㄷ 과장을 노려보았던 것은 3년 차 사원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이었기 때문이다.</p><p>나는 그다음 날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것으로 그 저항을 이어갔다. 무단결근을 한 것이다(조심하시라, 노동자의 무단결근은 회사의 사정과 업무 내용에 따라 단 며칠만으로도 정당한 해고 사유가 되니까). 오후 느지막이 상사에게 전화해 “퇴사하겠다”라고 선언하고, 혼자 차를 몰고 강화도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왔다.</p><p>이튿날 회사에 출근했더니 ㄷ 과장은 내게 즉각 사과했다. 나는 그 사과가 진심임을 알았지만, 과장 때문에 퇴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실 그를 전혀 미워하지도 않았고 평소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어서 후배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술자리에서의 그 폭력 사건은 너무 경미한 것이어서 사실 아주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나는 무언가 모를 답답함과 인생에서 쌓인 울분을, 그 술자리를 기화로 폭발시켰는지도 모른다.</p><p><strong>직장 내 괴롭힘 방지 규정에 거는 기대</strong></p><p>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퇴사를 결심하고 있었고, 실제로 2년 후에는 대학원 진학을 위해 그것을 감행하게 된다.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고, 퇴사를 입으로 뱉은 뒤에는 두려워졌다. 대책 없는 퇴사 선언 이후 시간이 지나자 차가운 현실을 파악하기 시작했고, 슬그머니 퇴사를 번복하고 싶은 마음이 자리를 잡았다. 당시 나이 스물아홉. 안정적인 회사를 그만두고 해외여행을 갔다 돌아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내게 뭔가 하고 싶은 게 남아 있기나 한가. 선후배들과의 몇 차례 술자리 끝에, 나는 ㄷ 과장에게 사과하고 회사의 내 자리로 패잔병처럼 돌아왔다.</p><p>내 경우는 일회적인 사건에 불과했지만, 통상의 직장 내 괴롭힘은 매우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폭력이 행해질 경우 그 강도가 점증하는 형태로 구성된다. 폭언이나 업무적으로 보이지 않는 괴롭힘의 사례가 더 많기도 하다.</p><p>직장 내 괴롭힘 방지 규정이 7월16일부터 시행되었다. “사용자 또는 근로자는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근로기준법 제76조 2항).” 누군가에게 부당한 고통을 받으며 임금노동을 제공해야 하는 노동자는 이제 사라질 수 있을까? 이 법이 그 작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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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quot;양승태 구속된 날, 피고인이 된 법원&quot;</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90125-226476</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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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5 Jan 2019 01:25:41 GMT</pubDate>
      <description>&quot;헌정 초유 전 대법원장 검찰조사…&apos;사법 치욕&apos;의 날&quot;. &lt;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gt;(정재민 지음, 창비 펴냄)를 읽기 시작할 무렵 나온 일간지 헤드라인은 이...</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헌정 초유 전 대법원장 검찰조사…'사법 치욕'의 날".</p><p><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정재민 지음, 창비 펴냄)를 읽기 시작할 무렵 나온 일간지 헤드라인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날, 피의자로 조사받던 전직 대법원장이 헌정 역사상 최초로 구속되었다.<br/><br/>작금의 사태는 비단 그 당사자인 법관들과 법원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 실체가 모호한 법관, 검사, 변호사를 아우르는 '법조 3륜'이라는 말을 꺼내들지 않더라도, 대법원 옆 서초동 현장에서 바라보는 법원의 이 위기는 법률가들의 위기로 보인다. 그렇게 답답한 마음에 휩싸여있을 때, 우연히 전직 판사의 책을 꺼내들었다.<br/><br/>이 책은 형사소송 일반 절차를 따라, 판사가 법정에 나서기 전 어떤 상념을 갖는지, 소송의 첫 단계인 피고인에 대한 인정신문부터 증거조사를 진행하기까지, 그리고 변론이 종결된 후 실제 판결문을 작성하고 이를 선고하는 것까지, 각각의 흐름에 따라 해당 절차의 의미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중간 중간 저자가 실제 경험한 사건들을 기반으로, 변용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형사 재판에 임하는 판사의 마음을 고백한다. <br/><br/><strong> 판사의 인간적인 고백</strong><br/><br/></p><img src="https://sy9rz9r4oqrpzyzy.public.blob.vercel-storage.com/art_1548377977-1.jpg" alt=null title=null/><p><em>▲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정재민 지음, 창비 펴냄). ⓒ창비</em></p><p> 변호사인 내가 보기에 이 책의 진가는 형사절차의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보다, 판사가 판결을 내릴 때 과연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갖는지 가감 없이 꺼내 보인 점들에 있었다. 이를테면, 형사 재판을 처음 맡게 된 저자는 자기 죄에 대한 '자백'보다 '부인'하는 피고인을 훨씬 나쁘게 판단했다고 한다. 부인하는 피고인에 대해선 양심이 없고 파렴치하고 뻔뻔하므로 훨씬 더 엄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 경험이 쌓이면서 저자는, 잘못이 있어도 인정할 수 없는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죄를 부인한 것만 두고 무조건 그 사람을 파렴치하다거나 양심이 없다고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고백한다.<br/><br/>시민들은 판사들이 완전무결한 존재이며, 그들이 내리는 판결 역시 어떠한 흠결도 없는 정확하고 완전한 것이 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존재 자체로 불완전한 인간이 하는 '일'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완전무결을 지향하는 것과 그 결과가 진정으로 완벽하게 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저자는 그것을 재판 과정에서 부딪히는 여러 사실과 경험을 통해 이것을 반복하여 말한다. <br/><br/>법대 위에 앉은 판사 역시 검사와 변호인의 주장과 증거들을 취합하여 불완전한 사실 관계를 토대로 심증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재판 초기에는 정말 확실한 사실 같은데 재판이 끝나고 나면 그렇지 않은 쪽으로 입장이 바뀌게 되는 것을 수백 번 겪"게 된다. <br/><br/>이러한 경험들은, 그럼에도 자신이 판사였던 시절에 실체에 부합한 판결을 하기 보다 변론주의, 입증책임, 증거법칙 등 법의 잣대에 '기대어' 기계적 중립을 지키기만 했던 자신을 반성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br/><br/>그 자체로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판결 실무와 관행에 대해 그는 이제 비판적인 입장에 서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판결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 불분명한 증거와 소송법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진실에 부합하는 정확한 판결이 그것이다. 저자는 판사를 사직하고 법대를 내려온 후 이러한 점을 더 명확하게 깨달았다고도 고백한다. 시민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사실과 다른 '억울한 판결'이 아니라 사실에 부합하는 '정확한 판결'임을.<br/><br/><strong> 판결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들</strong><br/><br/>특히, 많은 시민들이 판결의 결과만 놓고 비판할 때 항상 전제되는 사실들은 편견이 섞인 것들이 많은 것 같다. '판사들은 판결을 내리는 데 무소불위의 힘을 사용한다.' '범죄를 저지른 나쁜 자들에 대해서는 법이 허용하는 최대한의 처벌을 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한다.' '판사들이 시민의 감시와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판단한다.' 등등<br/><br/>법원을 오가며 경험한, 내가 생각하는 이에 대한 답은 이렇다. 판사들 역시 헌법과 법률, 상급심에 의해 그 자신의 판결이 교정당할 위험에 처해 있어 재량을 마음껏 사용하지 못한다. 범죄자는 범죄 자체로 피해자와 공동체에 해악을 끼친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처벌 정도는 판사가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고 법률로 제한된 만큼만 허용되며, 범죄의 해악만큼만 처벌 받는 것이 정의에도 부합한다. 나아가, 판사들은 오히려 시민의 감시와 비판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어, 최근에는 여론이 자신의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두려워할 정도이다.<br/><br/>어떻게 하든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판결을 내리는 처지에서, 판사들은 안간힘을 쓰며 오늘도 사건을 하나씩 처리해나가고 있다. 그 와중에 저자는, "당사자의 불충분한 증거 제시로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에 부합하지 않았다면 판사로서는 미안해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br/><br/>변호사 역시 법원을 무대로 일을 하는 소송 주체이지만, 실은 판결이 내려지는 과정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블랙박스'에 가까운 것이고 때때로 판사의 판결문만 읽고 결과를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전직 판사의 저 고백은 어쨌든 변호사에게도 위로로 다가오는 것이다.<br/><br/><strong>'법원'이 피고인석에 앉다</strong><br/><br/>저자는 과거 판사로 일하던 시절,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직업적 소명을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 같다. 법정에 나가기 전 법복을 입으며 '내가 판사인가'라고 자꾸 묻는 장면은 그의 직업에 대한 반성적 태도를 보여준다. 당연히 판사이지만 그래도 판사인지 물으며, "판사면 당연히 판사인 것이지 자꾸만 자신이 판사인지를 묻는 판사가 판사인가"라고도 묻는 것이다. <br/><br/>그렇게, 저자가 법복을 입으며 판사임을 묻는 것은, 법관으로서의 자신이 헌법 제103조에 따라 오늘도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자기 신문이 아니었을까.<br/><br/>전직 판사의 이러한 고백과 반성은, 법원 행정을 담당했던 고위 법관들은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아니, 그들은 어떤 자기반성과 고민에 가닿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재판 독립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토대인 기계적 중립을 그들 자신의 손으로 훼손시켰다. 하루하루 힘들게 고민하며 재판을 하는 지방법원의 법관들이야말로 저 위의 법원행정처 판사들을 가장 원망하고 있지 않을까?<br/><br/>책의 5부 '피고인석에 앉아' 부분에서, 저자는 판사를 사직하기 전 피고인석에 앉아보고 싶어 그 자리에 잠시 있어보았다고 한다. 연수원 시절 검사석, 변호인석에도 앉아보았으니 피고인석에도 가보고 싶은 마음이었단다. 그리고, 이번 '사법부 재판 거래' 파동에 대해 "평범한 전직 판사"로서 국민들 앞에 송구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을 표한다.<br/><br/>송구스럽고 부끄러운 마음만으로 끝날 수는 없다. 이제 사법 행정을 담당했던 법관들은 과거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피고인석에 앉아'서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br/></p><p></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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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양승태의 고발, 그리고 김병로의 고발</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80710-20312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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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0 Jul 2018 00:41:18 GMT</pubDate>
      <description>사법 불신이 최고조에 달한 2018년 여름 &lt;부러진 화살&gt;(서형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2009년 초판)을 다시 읽었다. 이 책은 해직 교수인 김명호가 2007년...</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사법 불신이 최고조에 달한 2018년 여름 <부러진 화살>(서형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2009년 초판)을 다시 읽었다. 이 책은 해직 교수인 김명호가 2007년 1월 학교를 상대로 한 교수지위확인 소송에서 패소 판결을 받자, 항소심 재판장을 집으로 찾아가 직접 석궁을 발사한, 이른바 석궁 사건의 형사재판을 다룬다. 법원 안에서 펼쳐지는 변호인과 피고인, 검사의 공방과 이에 대한 법관의 판단을 보여주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법정 르포물이다. 초판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리지는 않았던 것 같고, 3년 후 같은 이름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뒤늦게 화제가 되었다. 책의 부제는 "대한민국 사법부를 향해 석궁을 쏘다"였다.<br/><br/>책을 처음 접했던 2009년에 나는, 형사소송법을 접하지도 못한 법학전문대학원 1년생이었는데 재판부의 '불공정'한 재판 진행에 매우 분개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9년 만에 다시 읽은 <부러진 화살>은 조금 심드렁한 느낌이 들었던 게 사실이고, 오히려 다른 지점에서 내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로스쿨 1학년의 강렬하지만 어설펐던 감흥은 어느덧 사라지고, 6년 남짓의 변호사 생활만큼 달라진 생각의 차이와 최근의 사법 스캔들로 배가된 다른 감동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br/><br/><strong> 피해자 양승태 대법관의 명예훼손 고발장이 말해주는 것</strong><br/><br/>법원행정처발 사법 스캔들은 이제 검찰에 의해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길 기다리고 있다. 대법원의 3차 조사보고서 공개 직후 검찰 조사 전 수사 개시와 관련된 쟁점 중 하나는, 대법원장 혹은 대법관이 직접 관련 범죄의 고발 주체로 나서는 것이 적정한지 여부였다. 대법원장이나 대법관이 사건에 대해 직접 고발하면 이후 진행될 재판의 공정성이 문제될 수 있다는 의견이 많았던 것이다. 사법부 최고 법관이 고발 주체가 되는 것이 범죄 성립 여부를 떠나 이후 진행될 수사에서도 공정성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br/><br/>그러나, 놀랍게도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06년 2월경에는 당시 양승태 대법관과 몇몇 고위 법관들이 명예훼손죄의 피해자로 기재된 고발장이 서울중앙지검에 접수된 사실이 있다. 당시 양 대법관 등은 고발장 접수 과정에서 이를 방조하거나 묵인함으로써 수사 개시의 발단이 된 것이다. 형식상 고발장은 당시 대법원 경비대장을 고발인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부러진 화살> 38쪽). 그러나, 명예훼손죄는 그 때나 지금이나 반의사불벌죄로써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경우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재판 과정에서 양 대법관 등이 처벌에 반하는 의사를 명시할 경우 피고인 김명호는 처벌받지 않는 것인데, 책에서 변호인이 처벌 의사를 법원에 확인하자는 주장을 한 이유이기도 하다.<br/><br/>여기서, 2007년 석궁 사건의 형사 피고인이었던 김명호 교수와 양승태 대법관의 관계는 10여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양승태 대법관은, 대학의 입시문제 오류를 지적하고 해직된 김명호 교수가 1997년 처음 부교수 지위 확인 소송을 제기했을 당시 항소심을 담당했던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였다. 사건 패소 이후, 2005년경 김명호 교수는 ‘양승태 대법관님, 입시부정도 대학의 자유재량입니까?’라는 피켓을 들었던 것이 명예훼손의 범죄 사실로 고발된 것이다(<부러진 화살> 33쪽). 대법원 경비대장이 직접 고발인으로 등장하게 된 경위는 무엇이었을까.<br/><br/>고발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담당 검사의 기소로 재판으로 이어졌고, 2007년 8월 17일 김명호의 명예훼손 사건 재판에 출석한 경비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p><p>"2006년 3월경 제가 법원 경비 담당 책임자로서 고발하게 된 것은 대법원 재판 사무국에서 여러 가지 검토해서 고발장을 작성을 했는데 제 이름으로 하자고 해서 (…) 사주가 아니고요. (…) 지금 저에게 고발 취하할 생각이 있는지 묻고 계신데, 이 건은 명의만 제가 한 것으로 되어 있는 거지만 고소는 전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 어렵습니다. 혼자 결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허위인지는 재판 사무국에서 판단을 하는 것이지 저는 잘 모릅니다."(<부러진 화살> 73~74쪽).<br/><br/>결국, 김명호는 이후 석궁 사건 재판과 명예훼손 사건이 병합·심리되어 명예훼손죄에 대해서도 일부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법관이 어떤 범죄의 피해자로서 피의자를 고소하거나 제3자가 이를 고발하는 것은 각각 권리 행사의 일환이므로 논하기 어렵다. 다만, 대법관이 명예훼손의 피해자가 된 사건에서 대법원 경비대장 명의의 고발장이 접수되고 그 가해자가 형사 재판을 받게 된 것은 조금 묘한 장면이라고 하겠다. 경비대장이 법정에서 '사주가 아니고요'라고 말한 것도 여러 해석의 여지가 있는 진술이다. 특히, 법정 증언과 같이 고위 법관들이 대법관을 위하여 고발장을 대리 작성해주고 이를 검찰에 접수하게 한 것은, 최근 법원행정처 엘리트 법관들의 '충성 행위'와 겹쳐 보여, 법원을 바라보는 변호사인 나는 착잡한 감정을 숨기기 어렵다.<br/><br/><strong> 대법원장의 또 다른 고발, 가인 김병로의 반민특위 고발 사건</strong><br/><br/>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법관들의 존경을 받았던 이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 선생이 아닐까 한다. 한국의 민법, 형법 등 기본 법률을 기초한 법관, '한국 사법정신의 초석'을 세운 법관, 꼬장꼬장한 딸깍발이 선비 이미지를 가진 법관, 가인 김병로. <br/><br/>과거 우리 현대사엔 대법원장이 직접 행정 권력의 수장들을 검찰에 고발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제헌국회가 1949년 친일파인 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벌을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김병로 대법원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특별재판부를 구성했었다. 그러나 일제의 고등경찰이었던 자들이 여전히 경찰의 실권을 잡고 있었고, 특히 이승만 대통령 역시 반민특위법의 실행을 방해하고 있던 와중에,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특경대를 해체하고 그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사건을 접한 김병로 대법원장은 이러한 행동이 상부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그가 한 일은, 당시 내무차관 장경근, 치안국장 이호, 시경국장 김태선, 중부서장 윤기병 등 6명을 상해 및 공무집행방해죄로 검찰에 고발한 것이었다(한국의 법률가상(최종고), 길안사). <br/><br/>앞서 사법피해자가 들었던 피켓을 이유로 시작된, 대법관의 명예훼손 고발 사건과 초대 대법원장의 고발 사건의 차이가 보여주는 지점은 명확하다. 법관의 진짜 명예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br/><br/>김병로 대법원장은 1953년 법관훈련회의에서 법관의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br/><br/>"법관의 몸가짐은, 첫째 세상 사람으로부터 의심을 받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일반 국민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법관으로서는 최대의 명예손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서로서로가 주의를 환기하여 공통적인 책임감을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한 사람의 명예실추는 법관 전체의 명예실추가 되는 것입니다."<br/></p><p><br/></p><p>(계속)</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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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pos;승진&apos;이 놓이자 저울이 기울었다</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80530-19841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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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30 May 2018 01:06:20 GMT</pubDate>
      <description>&quot;존경하는 우리 법원의 형사단독판사님께. 법원장입니다. 휴가는 잘 다녀오셨나요. (…) 정치적인 냄새가 나는 사건에서, 순수한 사람은 담당 판사밖에 없습니다. 피고인과 시민단...</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존경하는 우리 법원의 형사단독판사님께. 법원장입니다. 휴가는 잘 다녀오셨나요. (…) 정치적인 냄새가 나는 사건에서, 순수한 사람은 <u>담당 판사밖에 없습니다.</u> 피고인과 시민단체, 정부와 정치권, 언론 등 모든 부문이 재판의 결론은 물론 진행 과정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할 태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법원의 권위가 어떻고 해봐야 귀나 기울이겠습니까. 답답한 심정에서 조금 무리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법원장 드림." (밑줄 강조는 필자)<br/><br/>2008년 8월 14일 당시 신영철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 '무제'라는 제목 아래, '정치적 사건에 대해 보편적 결론을 도출해 달라'는 취지로 담당 판사들에게 보낸 메일이다(<기울어진 저울 : 대법원 개혁과 좌절의 역사> 202~203쪽. (이춘재, 김남일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br/><br/>법원장이 위 메일을 보낸 2008년 8월은, 이명박 정부 출범 첫 해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문제로 서울과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 인파의 촛불집회가 벌어졌던 시기다. 이후 집회의 열기가 수그러들 즈음, 수사기관은 기다렸다는 듯 주요 집회 참가자들을 상대로 교통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를 남발하였고, 그에 따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도 관련 형사 사건들이 다수 쌓여가던 때이기도 했다(☞관련 기사 : <a target="_blank" rel="noopener noreferrer external" class=null href="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4328" title=null>광화문 촛불에서 MB의 그림자를 보다</a>).<br/><br/><strong> 대법관 승진을 위한 서울중앙지법원장의 재판 개입</strong></p><p><br/></p><img src="https://sy9rz9r4oqrpzyzy.public.blob.vercel-storage.com/art_1527641226-1.jpg" alt=null title=null/><p><em>▲<기울어진 저울>. ⓒ한겨레출판</em></p><p> 신 법원장으로서는 사건이 가장 많이 배당된 서울중앙지법에서 '엉뚱한' 판결이 나와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새 정권 출범 후 권력 핵심에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책의 저자들은 촛불집회 참가자들 사건을 일부 보수 성향의 재판부에 몰아주어 그들에게 유죄가 선고되도록 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법원장의 의도가 있었다고 추측한다(<기울어진 저울> 196쪽).</p><p></p><p>'이대로 무사히 고비를 넘기면 대법원 입성에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는 법원장은 그 후 어떻게 되었나? 그의 바람대로 신 법원장은 이듬해 1월 이용훈 대법원장에 의해 대법관에 임명 제청되었다. 대법관으로의 '승진'을 그렇게 갈망했던 그의 뜻을 드디어 이룬 것이다.<br/><br/>대법원은 제청 즈음 친절하게도 보도자료를 통해 천거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p><p>"신영철 피제청자는 법조계 내에서 법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사회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겸비한 법관의 전형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u>재판의 독립에 대한 강한 신념</u>과 따뜻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재판과 행정업무를 처리함으로써 주위의 신망이 두텁다."</p><p>아이러니하다.<br/><br/>2018년 5월, 10년 전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장에 의해 촉발된 '재판 개입 이메일 스캔들'은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어떤 것으로, 이제는 더 많은 수의 엘리트 법관들이 개입한 사법 스캔들로 재등장했다.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지난 주말 발표한 조사보고서의 내용은, 법원을 신뢰하던 자의 바람을 무참하게 무너뜨리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조사보고서의 내용을 보도하는 언론을 보면서 정말이지 참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법률 해석에 관한 최후 심판자인 대법원이, 법치주의의 수호자인 그 법관들이 어떻게 이렇게 타락할 수 있단 말인가.</p><p>조사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법원의 사법행정을 총괄하는 법원행정처 소속 법관들 일부가 지난 정권에서 재판을 행정권력과 거래의 대상으로 보았고, 실제 뒷거래를 시도하려 했던 정황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br/><br/><strong> 법원행정처 사법 스캔들에 대한 하나의 해석</strong></p><p><br/>사건의 추이를 보건대, 박근혜 정권 아래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벌였던 희대의 재판 거래 스캔들은 법원 아닌 외부의 수사기관에 의해 관련자들이 조사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온갖 논평과 주장이 난무하는 와중에, 사법부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과 관련한 말들을 보태어 무엇 하겠는가. <br/><br/>다만, 변호사로서 이 사건을 잠시 떨어져 바라보면 대법원이 그렇게 원했던 '상고법원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졌나'라는 의문에 빠지게 된다. 기억을 돌이켜보면, 대법원이 2015년경 상고법원을 중점 입법 과제로 추진하고 있을 당시, 변호사단체나 시민단체 등 주변 이해관계자들은 상고법원 도입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기존 대법관 증원을 더 선호하고 있었다. 결국, 2016년 5월 19대 국회의 마지막 회기가 끝나자 상고법원 법안은 자동 폐기되었고, 엘리트 법관들의 기대도 좌절되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폐기될 법률이었는데, 법관들이 왜 그렇게 상고법원을 추진했을까? <br/><br/>대법원 혹은 법원행정처와 그 구성원 법관들은 각각의 입장에서 상고법원에 자기 욕망을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상고법원은 조직적 차원에서, 그리고 법관 개인적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먼저, 조직적으로 대법원은, 상고법원이 도입됨으로써 최고법원으로서의 지위를 더 확고히 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p><p>우리 헌법은 '최고 법원'으로서의 법원을, 법률을 해석·적용하는 대법원과 헌법을 해석하는 헌법재판소로 이원화하고 있는데, 1987년 헌법 개정 이후 헌법재판소가 날이 갈수록 그 위상과 정책 기능을 제고하였으나, 대법원은 상대적으로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권리구제와 관련한 '작은 재판'을 담당하며 외관상 왜소해진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당장 두 번에 걸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이나 행정수도 이전 법률 위헌사건에서 주인공은 헌재였다).</p><p>대법관마다 매년 3000~4000 건을 심리해야 하는 업무 부담을 완화하고 헌법재판소처럼 '빛나 보이는' 사건 만을 담당하고 싶은 조직적 욕심이 대법원에는 분명히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대법관 수를 증원시키는 방안에 대해서는 전원합의체의 구성과 심리가 어렵다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웠으나, 실상 대법관을 증원시키면 대법원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다시 말해 상고법원은 대법원의 조직적 권위를 높이 세우는 일환으로 추진되었고, 조직의 승진을 위한 욕망이 진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br/><br/>상고법원의 또 다른 한 가지 의미는 바로 엘리트 법관들의 개인적 차원에서 발생한다. 이미 고등법원 부장판사 자리는 늘리기 어렵고 점점 더 많은 승진 후보자들이 발생하는 가운데 한정된 자리를 두고 법관들 사이의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예컨대, 법원에는 과거 동기 중 4:1의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비율이, 10:1로 악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실정이다).</p><p>그렇다면, 고등법원 위에 상고법원에서 재판을 담당할 '상고법원 법관' 승진 자리를 입법을 통해 대거 생산해낸다면, 치열한 승진 경쟁을 획기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p><p>법원행정처 사법 스캔들이 대법원의 정책 법원으로의 격상이라는 조직적 욕망과 함께, 이것을 추진하는 법원행정처 엘리트 법관들의 개인적 승진에 대한 집합적 의지가 동시에 작동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이유이다.<br/><br/>실제 특별조사단의 이번 3차 보고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하위 문서들의 존재는, 법원행정처 소속 '부하' 법관들이 단순히 대법원장 또는 행정처장 등의 지시에 단순히 순응하기보다 적극적이거나 자발적으로 직접 업무 수행에 나섰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같은 차원에서, 비단 법원행정처에 속하지 않더라도 법원 내 어떤 법관들은 조직적, 개인적 열망의 발현으로 상고법원의 도입에 적극 찬성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물론, 재판 거래의 형태를 알게 되면 이것을 지지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현 시점에서 밝혀진 사실은, 많은 잠재적인 '신영철 법원장'들이 저 엘리트 법관의 요람 법원행정처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br/><br/><strong> 무엇을 할 것인가 : 법관 승진제도를 없애자</strong></p><p><br/>결국, '승진'이 문제다. 시민들은 어려운 시험에 통과하여 헌법과 법률로 지위를 보장받는 법관들이 그렇게 승진에 목매는 현상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법원 역시 우리 사회 안에서 구성된 것이고, 인정 투쟁과 위계 서열이 강조되는 한국적 조직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희대의 스캔들로 기록될 이번 사건에 대해, 사법행정권 남용을 방지할 대책을 세우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나아가, 보다 근본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법관의 승진 욕구와 동기를 어떻게 제어하고 법원 조직을 디자인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봐야 할 것이다. <br/><br/>특히, 대내외적으로 신영철 대법관이나 양승태 대법원장이 똑같이 사법부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을 외쳤다는 의아한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그들은 법원 조직에 유리한 경우, 자신의 승진에 도움 되는 경우에 한하여 사법과 재판의 독립을 외쳤다.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하는 재판이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번 법원행정처의 법관들 역시 재판을 거래의 수단으로 보는 점에서 그 관점이 동일하다고 평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엘리트로 불리던 법관들의 재판에 대한 일관된 태도는, 법원 내부의 승진 시스템이 훌륭한 법관을 선발하는 장치로서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br/><br/>그렇다면, 멀리 대법원까지 갈 필요 없이 현실의 법관들이 '마지막 승진' 자리로 여기는 고등법원 부장 판사 승진 제도를 없애는 것은 어떤가. 지방법원 부장판사 직에서 승진하여 가는 그 차관급 '고등 부장' 자리를 없앤다는 것이다. 1심 법관은 고등 부장들의 빨간 펜이 무서워 소신껏 재판하지 못하고, 좋은 인사 평정을 받기 위해 공적·사적으로 그들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지금 법원의 현실 아닌가. 그렇게 순치된 법관들만이 20여 년의 세월을 견뎌 고등 부장 자리를 꿰차고 법원장 보직과 대법관 자리를 위해 다시 승진 경쟁을 펼치는 것이 법원의 풍경이라면, 이것부터 바꿔보는 것은 어떤가. 김명수 대법원장은 법관 인사의 핵심 문제로 계속 지적돼 온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를 폐지할 예정이라고 한다. 나는 그 방향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며, 대법원장의 후속 조치를 기대해 본다.</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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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quot;부장검사의 개인주의를 응원한다&quot;</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80309-18837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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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9 Mar 2018 01:11:36 GMT</pubDate>
      <description>바야흐로 검사들의 수난시대다. 성추문부터 부당 수사개입 의혹까지, 수사의 주체였던 검사들이 그 대상이 돼 수사의 칼날이 겨눠진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사실 권위 부재의 한국 사...</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바야흐로 검사들의 수난시대다. 성추문부터 부당 수사개입 의혹까지, 수사의 주체였던 검사들이 그 대상이 돼 수사의 칼날이 겨눠진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사실 권위 부재의 한국 사회는 검사들을 '검새', '떡검'이라 부르며 조롱한 지 오래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br/><br/>이 질문에 대한, 검찰 내부의 작지만 소중한 항변이 최근 책으로 출간되었다. <검사내전>(김웅 지음, 부키 펴냄).</p><p>현직 부장검사인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미 '무척 화가 나 있었'고, '검찰에 들어온 뒤 이 조직은 늘 추문과 사고에 휩싸였다'고 선언하며, '검사동일체란 원칙 하에 위에서 사고를 치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모조리 욕을 먹어야 하는 기이한 상황'을 지적한다. 이러한 일성과 함께 저자가 하려는 진짜 이야기는, 시민들이 검사의 전형을 우병우, 진경준과 같은 검사로 떠올릴 때, 꼭 그렇지는 않고 검사가 하는 일도 인간적인 것들을 포함하며 검사 자신도 본질적으로는 생활인이라는 점이었던 것 같다(책의 부제가 '생활형 검사의 사람공부, 세상 공부'다).<br/><br/><strong> 범죄자를 처벌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strong><br/><br/></p><img src="https://sy9rz9r4oqrpzyzy.public.blob.vercel-storage.com/art_1520495745-1.jpg" alt=null title=null/><p><em>▲ <검사내전>. ⓒ부키</em></p><p> 책의 1부 "사기 공화국의 풍경"은 다양한 경제 범죄를 예시하고, 그 기구한 사건의 피의자, 피해자들과 그들과 부대끼는 검사 개인의 내면을 함께 보여주고, 2부 "사람들, 이야기들"에서는 1부와 비슷한 결에서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범죄 현실과 그 이면들을 보여준다.</p><p></p><p>여러 이야기들 중 '산도박장 박 여사의 삼등열차' 에피소드에 나오는, 상습도박죄의 피의자인 주부가 검사와 벌이는 설전은 마치 미국의 저명한 로스쿨 교수가 진행하는 소크라테스식 수업 만큼이나 박진감 넘친다. 도박의 습벽을 버리지 못함을 자식 된 자로 이미 이해하고 있던 딸이 검찰청에 찾아와 어미를 안아주던 장면은 얼마나 기구한가. 이 일화는 피해자 없는 범죄인 도박죄를 우리가 얼마만큼이나 법으로 다루어야 할 것인지 묻고 있다. <br/><br/>'법이란, 법의 집행이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작은 답들이 책 4부 '법의 본질'에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사실 책을 산 후 3부 '검사의 사생활'을 가장 먼저 읽었다. 그것은 부장검사라는 저자의 희소성과 맞물려, 도대체 검사가 자기 조직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라는 관음증적 호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고 악을 척결하는 이미지를 갖는 미디어 속 검사 이미지는 편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지방검찰청 집무실에 서 일선 검사들의 그 피곤한 표정들과 방마다 펼쳐지는 피의자들과의 실랑이들을 접하면 그 환상이 완전히 깨지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검사가 하는 수사 '업무'의 대부분은, 두꺼운 서류더미들을 미리 읽고 나중에 이것을 피의자들에게 하나씩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단순 업무'들 사이에 어떤 긴장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 역시 회사원으로서 조직에 순응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응의 질서는 아직 일반인인 우리가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에 <검사 내전>의 '고발'이 더 흥미롭다.<br/><br/><strong> '회사원'으로서의 검사</strong><br/><br/>그래서, 3부 '검사의 사생활'은 책에서 가장 분량이 적었지만, 역시나 내겐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이를테면, 저자가 전체 검사회의를 할 때나 검사장 고향에서 진행한 체육행사에서 소신 발언을 한 후 '또라이', '모지리', '부적응자'로 찍힌 이야기가 그렇다. 압권은 차장검사의 술자리 내기 에피소드였다. <br/><br/>저자가 야근을 하고 있는데 차장검사와 법원 수석부장판사가 인근 술집에서 내기를 하여, 각자 부하직원들을 호출해 어느 쪽이 더 많이 나오는지 내기를 했단다. 그때 차장검사가 저자에게 야근 중인 검사들에게 연락하여 나오도록 지시했는데, 저자는 각 부의 막내 검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차장의 지시를 전달했을 뿐 정작 본인은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 날 내기에서 진 차장검사가 부장검사들을 모아 일장 훈시를 했고, 그 와중에 직접 호출을 받은 저자가 더 심하게 부장검사로부터 꾸지람을 듣게 된다. 그 때 저자가 했다는 말이다.</p><p>"그게 단합이면, 그럼 제가 술 마시다 차장님을 불러도 차장님이 나와주나요?"</p><p>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쯤되면 나 역시 저자의 기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br/><br/>우리가 회사원, 조직원으로서 하루를 버텨내는 힘은 거창한 이념이나 목표가 아니라, 자신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아닐까. 어쩌면 차장의 부당한 호출에 저항하는 것이 저자가 조직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은 아니었을까. 학생 시절 한때 '어설픈 사회주의자'였던 저자가 스스로를 지켰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초임 시절의 기백을 부장검사가 된 지금도 온전히 간직하고 있을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인간은 적응하기 마련이고, 조직 안에서는 그 구심력을 이겨내기 어렵다. 개성이 강한 조직원 역시 촘촘한 평가와 감시를 견뎌내야만 하고 조직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저 에피소드들에서 발견되는 저자의 어떤 '개인주의'를 응원한다. 엉뚱하지만 지금 검찰 조직에 가장 필요한 것 역시 저 개인주의자들 아닐까. 저자가 부장검사가 아니라 검사장이 되어 평검사들의 업무 권한과 발언권을 더욱 인정하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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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판사를 어떻게 믿느냐고요?</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71214-17943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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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4 Dec 2017 02:19:24 GMT</pubDate>
      <description>슬픈 우리 역사에 가끔 등장했던 판사의 이미지는 순응하는 창백한 엘리트로 묘사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중앙정보부 직원이 법원에 상주하며 판결 자체를 감시하던 엄혹한 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슬픈 우리 역사에 가끔 등장했던 판사의 이미지는 순응하는 창백한 엘리트로 묘사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중앙정보부 직원이 법원에 상주하며 판결 자체를 감시하던 엄혹한 시절임을 감안하더라도, 고문과 은폐, 조작으로 점철된 수사 기록을 아무 말 없이 순한 양처럼 받아들이던 그 법관들 말이다. 그들의 형사 법정에서는, 어떤 피고인들이 들어와도 마치 컨베이어 벨트를 통과하면 주문 제작된 결론이 나오는 것처럼 '생산'된 유죄 판결이 있었다. <br/><br/>그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가 '2차 인혁당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 군사 정권을 전복하고 민중에 의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학생 데모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여덟 명의 피고인들은, 1심-2심-대법원까지 한결같은 유죄 판결이 확정된 후 불과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국제법학자협회는 사형 집행이 있었던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치욕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다.<br/><br/><strong> 사법 불신의 기원</strong><br/><br/>그리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사법부는 그 치욕을 극복하고 명예로운 자리에 앉아 있는가. 이제 법원은 물리적인 외부 세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시민들로부터 불신의 눈초리를 받는 것 같다. 언론에 등장하는 정치적인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과격한 논평 외에도, 실제 내가 '필드'에서 만나는 민·형사 사건의 당사자들 역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사법에 대한 신뢰에 의문을 표시하곤 한다.</p><p>'대형 로펌 소속 상대방 변호사는 혹시 재판장과 친분이 있는 거 아닐까요?'</p><p>작은 회사에 속한 나는 이 때 법원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p><p>'뉴스에 가끔 나오는 판검사들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에 불과하니 이를 성급하게 일반화시켜서는 안 되고, 우리 사법부는 내가 만나본 그 어떤 집단보다 성실하고 도덕적이다.'</p><p>나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br/><br/>하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몇몇 판사를 제외하곤 실제 내가 '사법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진행하는 재판들을 통해 만나는 법관들은 전체 3000여 명의 법관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 않은가. <br/><br/><strong> 현직 부장판사가 쓴 소설, <미스 함무라비></strong><br/><br/></p><img src="https://sy9rz9r4oqrpzyzy.public.blob.vercel-storage.com/art_1513215387-1.jpg" alt=null title=null/><p><em>▲ <미스 함무라비>. ⓒ문학동네</em></p><p> 그 고민의 와중에, 판사가 소설 형식을 빌려 법원 안팎의 이야기를 풀어낸 <미스 함무라비>(문유석 지음, 문학동네 펴냄)를 읽었다. 현직 지방법원 부장판사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판사들이 어떻게 일하고 생각하는지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일주일이면 몇 번씩 법정에서 마주치면서도 몰랐던 그들 일상의 장면들을 보면서 묘한 관음증적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br/><br/>서울중앙지방법원 내 가상의 합의부를 배경으로, 한세상 부장판사와 임바른 판사(우배석), 박차오름 판사(좌배석)가 마주하는 사건들은, 저자의 직간접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서인지 너무나 현실적이다. 저자는 오히려 그 리얼리티를 조금이라도 감쇄해보기 위해 주인공 이름을 희화화하여 짓고, 각 에피소드들에 콩트적인 요소들을 가미한 것처럼 보인다. 원고가 지면의 제한이 있는 신문에 연재되던 것이어서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기승전결이 명확한 것도 읽기에 편했다. 아마도 저자는 시민들이 <미스 함무라비>를 많이 읽고, 사법부 구성원들이 어떤 고민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개인적 시민으로서의 법관'으로 이해받고자 했던 욕심을 품은 것 같다. <br/><br/>그리고, 그 욕심을 통해 저자가 최종적으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재판하는 자의 한계와 숙명을 법관들 본인 역시 깊이 체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싶다. 자신들이 단순히 잘나고 뛰어나서가 아니라 시민들로부터 잠시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는 한계를 엄중하게 깨닫고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도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책의 첫 부분, 초임 박 판사에게 법복을 주며 한 부장판사가 하는 말은 바로 저자의 것이다.</p><p></p><p>"그 옷은 주권자인 국민이 사법부에 위임한 임무를 상징하는 겁니다. 명심하세요."<br/><br/>사시 수석, 연수원 수석 출신으로 등장한 오 부장판사 역시 자기 한계를 이렇게 드러내고 있다.</p><p>"난 우연히 공부 하나 잘하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 직업을 갖게 되었죠. (…) 그런데 하면 할수록 내가 이 일을 할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 속의 괴물을 들여다볼수록 내 안의 괴물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사람들은 내 겉만 보지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들은 보지 못해요. (…) 처지가 바뀌었으면 나 또한 내가 재판하는 범죄자들과 같은 짓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br/><br/><strong> 재판의 한계와 숙명</strong><br/><br/>저자의 인식은, 에피소드 중간에 등장하는 에세이에서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난다.</p><p>"법이나 재판이란 건,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 안온한 중산층의 도덕을 강요하는 게 아닐까"하고, 업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던지는 것이다. 법관의 판단이 도저한 한계에서 행해지는 것은 그들이 완전히 가닿을 수 없는 '진실'로부터 비롯된다. 진실이란, 사건을 더 직접적으로 다루는 검사나 변호인으로서도 알 수 없는 것이다. 피고인 자신만이 스스로 무죄인지 유죄인지 알 수 있을 뿐이며, 그를 온전히 판단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저 위의 신만이 아닐까.<br/><br/>그래서, 책의 가장 안타까운 장면은 한세상 부장판사가 사직서를 던지는 부분이었다. 한 부장은 늦은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 성적이 좋지 못하면서 정치에도 능하지 않아 법원 조직에서 무시당하지만, 무엇보다 서민을 이해하는 부장판사였다.</p><p>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부족한 인간이 너무 오래 이 자리에 버티고 있었다"는 자기 고백과 함께 옷을 벗는다. 한 부장과 반대편에 서 있는 자는 성공충 부장판사다. 그는 동기 중 첫 번째로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되었고, 기자들에게는 폭탄주를 돌리며 오늘도 스마트폰의 건배사와 인기 유머 시리즈를 읊고 있는데, 투철한 국가관과 지역 대표성을 무기로 대법관을 향해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인물이다. <br/><br/>저자가 한세상과 성공충의 명확한 대비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어렴풋이 드러난다. 사직서를 던지고 마지막 재판을 마친 한 부장판사가 국민참여 재판의 배심원들에게 정중하게 고객 숙여 인사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나는 그 장면이,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더욱 확대될 참여재판 제도와 시민 배심원들에 대한 저자의 사려 깊은 지지와도 같이 느껴졌다.<br/><br/>범죄를 저지른 전·현직 고위 법조인들이 구속되고 처벌받는 뉴스들을 지켜보는 것은 일개 변호사로서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들이 나의 선배라는 동류 직업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가끔씩 만났던 사법불신이 현실에서 똑똑하게 증명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법관과 판결에 대해 깊은 고민 없이 섣불리 내려지는 비난과 과도한 사회적 비판 앞에 서면, 나는 법조를 구성하는 변호사로서 법원을 변호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우리 법원에는 한세상 부장판사와 같은 분들이 여전히 더 많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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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검찰에 의지하는 검찰 개혁?</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71116-17613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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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5 Nov 2017 23:38:12 GMT</pubDate>
      <description>과거 검찰청법은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이렇게 천명했다. &quot;검사는 검찰사무에 관하여 상사의 명령에 복종한다.&quot;(제7조 제1항) &apos;복종(服從)&apos;의 사전적 의미는 &apos;남의 명령이나 의...</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과거 검찰청법은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이렇게 천명했다.</p><p>"검사는 검찰사무에 관하여 상사의 명령에 복종한다."(제7조 제1항)</p><p>'복종(服從)'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명령이나 의사, 또는 규칙 따위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그대로 따름'을 말한다. 노무현 정부는 바로 저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폐기한다고 선언하며 검찰청법 일부를 개정했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을 배석시킨 검사들과의 대화에서, 대통령이 수사와 관련된 청탁을 했다는 한 검사의 말에 '이쯤 되면 막 하자는 거지요'라고 응수한 바로 그 즈음이었다. <br/><br/><strong> 검찰청법 검사동일체 조항 폐지의 의미</strong><br/><br/>2004년 개정된 검찰청법은 다음과 같다.</p><p>"검사는 검찰사무에 관하여 소속 상급자의 지휘·감독에 따른다."(제7조 제1항)</p><p>"검사는 구체적 사건과 관련된 제1항의 지휘·감독의 적법성 또는 정당성 여부에 대하여 이견이 있는 때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제7조 제2항)</p><p>복종 대신 지휘·감독으로 표현이 바뀌었고, 개별 검사의 상급자에 대한 이의제기권이 도입되었다. 그렇다면, 위 법률의 개정이 있기 전에 검사는 상급자의 검찰사무 지휘에 대한 이의제기를 할 수 없었는가.<br/><br/>개정 전 검찰청법 제4조는 이미 검사를 "공익의 대표자"로 명기하고, "그 직무를 수행할 때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며 주어진 권한을 남용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공소를 제기하고 수행하는 공소권의 주체인 검사는 이미 단독제 행정관청에 해당하며 독자적인 권한을 가지므로 별도로 위와 같은 법률 개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노무현 정부가 검찰청법을 개정하면서까지 검사의 이의제기권을 명문화한 것은, 검찰 조직 안에서도 구성원들의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사건의 결론을 내볼 것을 강하게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br/><br/>외부에서 보는 검사의 이미지와 달리 검사들은 단일한 생각을 가진 인격 없는 무생물적 존재가 아니다. 그들 역시 다양한 출신 배경과 그 만큼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시민의 일원인 것이다. <검사님의 속사정>(씨네21북스 펴냄)은 그러한 검사들이 도대체 어떻게 일상을 보내는지, 어떤 고민을 하면서 검사 일을 하는지 상세하게 기록한 '현장 르포'다. 평소 신문 사회면에 짧게 기소(불기소) 결과로만 보였던 겉모습과 달리, 한겨레신문 법조기자 출신 저자 이순혁은 수년 간 검사들과 부대끼며 옆에서 지켜본 그들의 속사정을 생생하게 들려준다.<br/><br/>이를테면, 잘 나가는 검사들만 모인다는 서울중앙지검 검사들 사이에서도, '잡범'을 취급하는 형사부에서 인지수사를 하는 공안부, 특수부 등으로 보직 이동을 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저자는 검사라도 다 같은 검사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검사 사회도 철저하게 20대 80의 법칙이 관철되는데, 검찰 요직만을 도는 소수 엘리트 검사와 지방 검찰청을 전전하는 소외된 검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p><p>특히, 부장검사 이상부터는 아예 동기 전체가 서열이 매겨져, 매년 이동하는 보직에 따라 검사 동기들 중 몇 등인지, 그래서 검사장 승진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본인과 주변이 다 안다고 한다. 엘리트 검사들을 선별하는 인사 요인으로 학연과 지연, 근무연과 혈연 등을 지적하는데, 각종 연줄로 매개된 검찰 인사가 조직을 망친다는 결론에 이른다. <br/><br/><strong> 회사원동일체도 존재한다</strong><br/><br/>저자는 검찰 인사가 전근대적인 연줄이 아니라 업무 성과나 능력에 따라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 번 맞는 말이지만 공허하다. 묻고 싶다. 승진을 포함한 인사 시스템이 정량적으로 측정될 만큼 공정한 조직이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지. 화이트칼라들 역시 회사 정치의 비정함과 아부의 효과성을 충분히 체득하고 있다(사실 '회사원동일체'도 존재한다). 검사들도 사회의 다른 구성원만큼이나 한국적 현실에 맞게 진화해왔을 뿐이다. <br/><br/>저자도 아마 이러한 사정을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에, 출입 초기 검사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들이라는 선입견 같은 게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에게서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다만, 개별 구성원인 일부 검사들은 신뢰하게 되었지만 검사들의 집합인 검찰 조직에 대해서만큼은 문제의식이 더욱 강해졌다고 덧붙인다.<br/><br/>그렇다면 한국 검찰 조직의 진정한 문제는 무엇인가? 저자의 의견과 같이 검사 개인에게 어떤 책임을 모두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검사동일체라는 슬로건이 아니라 그것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조직'이 문제다. 나아가 나는 검찰의 기능에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가 전적으로 검찰 자체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검찰은 오히려 지금까지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으며, 정권의 요구에 따라 '물으라면 물었'을 뿐이다. 단언컨대 본질적인 문제는 검찰의 존재를 확대하여 부각시키는 검찰의 외부, 정치에 있다고 본다. <br/><br/><strong> 사법을 축소시키고 정치는 키우자</strong><br/><br/></p><img src="https://sy9rz9r4oqrpzyzy.public.blob.vercel-storage.com/art_1510738210-1.jpg" alt=null title=null/><p><em>▲ <검사님의 속사정>. ⓒ씨네21북스</em></p><p> 단적으로 2004년 16대 국회가 개정한 공직선거법, 정치자금법, 정당법(이하, 정치관계법)은 어떤 결과를 초래했나. 부패 정치 해소, 고비용 정치 구조 개선을 한다는 명목으로 개정된 정치관계법은, 결과적으로 정치를 축소시키는 대신 정치인을 단죄하는 검찰의 힘을 크게 키웠다. 당시 개악된 법률은 법정 지구당을 폐지시키고(정당법), 정당 후원회를 폐지했을 뿐만 아니라 법인·단체의 기부를 금지시켰으며(정치자금법), 나아가 국회의원 등 선거 기간을 축소하고 선거 기간 정당 활동과 선거 운동까지 크게 제한했다(공직선거법). 반대로 문제된 정치인들은 예외 없이 기소되고 처벌되었는데, 정치의 축소와 사법의 비대화가 진행된 것이다.<br/><br/>결국, 정치관계법 개악은 정치 부패 문제를 일소하지도 못하면서 정치 경쟁을 도덕과 법률의 위반 문제로 제한시키는 외부 효과를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2004년 정치관계법 개정은, 여당 소수파였던 노무현 계열의 정치적 계산과 이미 충분한 기득권을 보유한 한나라당의 포퓰리즘 추구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결과라고 보는 설명이 설득력 있다. 2009년, 그렇게 정치에서 자신의 지분을 확대한 검찰이 이명박 정부의 이해를 대변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망신주기 수사를 하고 비극을 촉발시킨 역사는 아이러니하다.<br/><br/>이제, 정치권 어느 곳에서 비밀스러운 정보가 흘러가거나 이를 미리 감지한 언론이 폭로한 후, 검찰이 범죄 사실에 대해 수사하고 기소하며 법원이 이를 단죄하는 폭로-조사-기소의 "RIP 과정"(revelation, investigation, and prosecution)이 한국의 주된 정치 과정으로 자리매김하였다(이른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 정치는 시민들의 동의를 구하거나 조직하는 본래의 경쟁에서 벗어나 상대방을 고소·고발하고 수사 기관을 활용하여 정적을 제거하는 극한의 대립 구도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사법의 영역에서 검찰의 '정치 행위'가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정치인과 정당의 역할이 작아졌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단순하게 말하면, 정치는 더 키우고 사법은 축소시켜야 한다. 필요하다면 정치관계법부터 개정하는 것은 어떤가.<br/><br/>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는 것은 공익의 대표자로서 검찰의 본래 지위를 회복하는 차원에서도 당연한 조치다. 그러나, 거기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검찰 개혁은 수사권 조정에서 나아가 정치의 공간에서 수사기관에게 원래의 몫을 찾아주는 것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쉽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검찰 개혁을 얘기하면서도 모든 사안을 수사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의도와 달리 앞으로 더욱 검찰에 의존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과거의 잘못을 모두 덮자는 얘기가 아니다. 정치의 몫을 키우자는 것이다.</p><p></p>]]></content:encoded>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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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pos;범죄와의 전쟁&apos; 하면, 우린 더 안전해질까?</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71102-174286</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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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01 Nov 2017 23:58:47 GMT</pubDate>
      <description>연예인이 키우던 개가 무고한 시민을 물어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아직 사망의 인과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더 놀라운 일은 그 우발적이고 비극적인 사건 이후에 발생했다. 온라인...</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연예인이 키우던 개가 무고한 시민을 물어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아직 사망의 인과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더 놀라운 일은 그 우발적이고 비극적인 사건 이후에 발생했다. 온라인 포털에 불어 닥친, 반려견과 이를 관리하지 못하는 견주에 대한 시민들의 강한 혐오와 불안이 그것이다. 시민들은 평소 거리에서 반려견에 대해 그렇게도 강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나. 연예인의 일상과 도덕적 흠결을 매의 눈으로 감시하는 대중과 짧은 시간 들끓는 언론의 속성을 감안하더라도, 이 사건을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는 이상하다.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안전'에 민감하게 만들었는가.<br/><br/>뉴욕의 경찰은 한 때 행동 지침에 따라 목줄 없이 개를 풀어놓는 시민을 체포할 수 있었다. 심지어 횡단보도를 무단 횡단하거나 벨을 울리지 않고 자전거를 질주하는 등 대수롭지 않은 상황에서도 시민을 체포하는 게 가능했다. <가난을 엄벌하다>(시사인북 펴냄)의 저자 로익 바캉은 이와 같은 형사정책이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 시장이 시작한, 범죄에 대한 일련의 '톨레랑스 제로' 정책에 따른 결과였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범죄에 대한 무관용 정책은 신자유주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br/><br/><strong> 범죄의 정치적 활용 : 신자유주의와 한국의 군사정권</strong><br/><br/>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정책이, 경제 부문에서 국가 역할을 줄이면서 사회복지 예산은 없애고 동시에 법원과 경찰, 감옥의 기능은 키운다는 것이 <가난을 엄벌한다>의 핵심 내용이다. 국가가 경제 부문에선 사라지고 형벌 부문에선 더 강력하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3대 덕목인 자유시장, 개인의 책임과 의무, 가부장적 가치를 더 확대하고 전파하고자 했던 맨해튼연구소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었고, 이를 선거에 적극 이용하여 당선된 줄리아니 시장이 1993년부터 '톨레랑스 제로' 정책으로 시정에 적극 반영하여, 신자유주의 형사 정책이 등장했다.<br/><br/></p><img src="https://sy9rz9r4oqrpzyzy.public.blob.vercel-storage.com/art_1509516865-1.jpg" alt=null title=null/><p><em>▲ <가난을 엄벌하다></em></p><p> 강력 범죄에 대한 무관용 정책은 그 자체로 시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엄벌주의 경향이 범죄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의 생활에도 침투하여 견주나 보행자, 자전거 운전자 같은 이들의 일상적 자유를 제한하는 데까지 나간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 대도시에서 시작된 무관용 정책이 결국엔 인종차별적으로 작용하여 흑인 수감자들만 배타적으로 늘렸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실제 범죄율 감소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연구도 있다. 본질적인 문제 해결 없이 시민들의 자유만 제한하는 결과만 초래한 것이다. <br/><br/>저자의 과감한 주장은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형사정책이 고도의 기만적 정책이라는 점으로 이어진다. 사회복지와 형벌 제도의 연계를 통한 치안 정책은 점증하는 사회불안과 그로 인한 하층 계급의 불안정을 응징으로 처벌하는 정치 프로젝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국가는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고 이를 개인에게 돌리는 데 성공한다. 범죄 혹은 범죄자에 대한 증오를 활용하는 것은 사회적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유권자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매력적인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br/><br/>더 적극적으로 우리는 사회 불안을 범죄에 대한 증오로 해소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과거 정치적 정당성이 미약했던 권위주의 정권이 시작될 무렵에는, 언제나 범죄자들과의 전쟁이 있었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초기에 자유당 정치깡패 소탕을 명분으로 내세우기도 했고, 전두환은 국보위에서 삼청교육대라는 기관을 세우고 상습폭력배들을 격리하여 수용했으며, 그나마 선거를 통해 당선된 노태우는 아예 '범죄와의 전쟁'으로 캠페인 이름을 정하고 이를 보안사 정치 스캔들을 감추는 데 활용했다.<br/><br/><strong> 중산층이 호출하는 범죄와의 전쟁</strong><br/><br/>우리 사회에서 범죄에 대한 무관용 정책은, 모범 시민인 중산층에게 감정적으로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안락하게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러한 중산층이 안전에 대한 불안을 가장 많이 경험한다는 것이다. 중산층은 자신이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사회적 지위가 하락할 위험을 걱정하고 주택담보대출을 연체하여 집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하며, 자신의 아이가 더 좋은 대학에 취업하지 못하여 사회의 하층계급으로 떨어질까 끝도 없이 걱정한다. 과거 범죄와의 전쟁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면 이제 시민들은 스스로 그 전쟁을 호출하고 있다.<br/><br/>견주와 반려견에 대한 증오와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견주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안전에 대한 강박의 기원을 한두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한국 사회에서도 신자유주의 형사 정책이 부상하고 엄벌주의가 확산되는 현상이 배경으로 지적될 수 있다. 최근 소년법 폐지 논란을 초래하며 청소년 범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의견이나 사형제 집행 찬성에 점점 동조하는 현상도 엄벌주의 경향에 부합한다. <br/><br/>우리의 불안이 한 걸음 나아가, 경찰이 목줄 없이 산책하는 견주를 재량껏 체포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가 된다면 시민들은 더 안전해지는 것일까. 다시 묻자. 한국 사회는 범죄나 사고로부터 시민의 일상적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사회인가? 그렇지 않다. 북한 변수를 제외하면 한국은 세계적인 안전 여행지이고, 객관적인 범죄율도 상대적으로 낮다. 우리의 불안은 범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br/><br/>그래서, 전염병처럼 우리 의식에 숨어들고 그것이 엉뚱하게 어떤 범죄와 범죄자에 대한 과도한 증오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강력한 치안을 통해 안정을 달성하여 스스로의 자유를 구속하는 사회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스스로 통제하는 사회를 지향할 것인가. 프렌치 불독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우리가 개에게 물리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면, 이제 해결해야하는 문제는 달라진다.<br/></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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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광화문 &apos;촛불&apos;에서 MB의 그림자를 보다</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1116-14432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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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5 Nov 2016 23:28:50 GMT</pubDate>
      <description>지난 11월 12일 광화문 집회는 &apos;정태춘&apos;을 다시 만난 집회였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시청까지, 광화문 앞에서 종로, 안국동, 경복궁에 이르는 100만 군중 앞에서, 은둔하...</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지난 11월 12일 광화문 집회는 '정태춘'을 다시 만난 집회였다.<br/><br/>광화문 사거리에서 시청까지, 광화문 앞에서 종로, 안국동, 경복궁에 이르는 100만 군중 앞에서, 은둔하다 드디어 우리 앞에 나타난 정태춘은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고,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 흘리지 말자"고 노래했다. 전인권이나 김광석 정도로 만족하고 살아가던 우리들은 불현듯 광화문 앞에서 정태춘을 만나곤 그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숨죽여 들었다.<br/><br/><strong> 정태춘과 이승환 사이</strong><br/><br/>정태춘의 비장한 미학과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분위기와 달리, 가수 이승환이 등장하자 군중들은 열광했고 그에 보답하듯 '하야하라' 개작 송으로 응답했다. 흥겨웠다, 집회에서 꼭 운동가를 군가처럼 합창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광화문과 종로 일대 골목 곳곳에서는 작은 퍼포먼스를 펼치는 예술가들의 춤과 노래가 시위대와 어우러져 광화문 거리는 시민 축제의 한복판이 되었다.<br/><br/>평화롭게 치러진 문화제와 같았던 광화문 집회에서, 일탈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차벽이 설치되었던 거리에서 일부 시민이 차에 기어오르자 시민들이 '내려와'를 연호했고, 잠시 흥분했던 시민 일부가 얌전히 차를 내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처음부터 줄곧 평화로웠던 100만 군중은 집회가 공식적으로 마무리된 후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치우고 줄 맞춰 지하철 역 입구로 뿔뿔이 흩어졌다. 혹자들은 지나치게 평화로웠던 100만 시위대와 그들의 도덕적 결벽성을 성토하기도 했다.<br/><br/>모든 집회에는 구경꾼부터 단순 참가자, 적극-극렬 참가자가 뒤섞여 있다. 전체 참가자 가운데 소수에 해당하는 극렬 참가자는 보통 집회 지도부나 주최 측의 지시를 무시하곤 했고, 그들 자신의 성정 때문에 혹은 집회 현장에서의 흥분 때문에 즉자적인 행동을 조직하기도 하고 폭력 행위를 일삼기도 한다. 과거 그들의 행위가 현행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br/><br/><strong> 극렬·폭력 시위대는 왜 사라졌나</strong><br/><br/>흥미로운 사실은, 이번 집회에서 그런 극렬 참가자들이 좀처럼 눈에 띄지조차 않았다는 것이다(청와대 부근 통행로 진입을 시도하던 스물세 명 정도가 연행되었을 뿐이다). 모든 집회에는 일정 비율로 위법 행위자가 등장하기 마련인데, 이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혹은 이들이 얌전해졌다. 무엇 때문인가? 이 질문은 법학의 영역이 아니라, 다분히 사회학적 분석이 필요한 의문일 것이다. 나는 얌전해진 시위대를 가능하게 한 배경으로 지난 몇 년간 검찰과 경찰의 집회참가자에 대한 끈질긴 법집행을 지적하고 싶다.<br/><br/>한국의 대규모 군중 동원 집회는 멀리 1987년 6월, 1991년 5월, 1997년 12월 등 다양한 시기에 존재했다. 하지만, 조직되지 않은 대중의 참여가 시작된 '촛불 집회'는 2002년 미선이-효순이 추모 집회, 2004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2008년 쇠고기 광우병 집회가 그 시작이었다.<br/><br/>수사 기관의 법집행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는 2008년 촛불 집회 이후에 벌어졌다. 경찰과 검찰은 화염병이나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폭력 시위자만이 아니라, 집회 참가자 가운데 얌전하게 도로를 행진했던 시민 단체 간사나 학생회 간부도 형법 제185조의 일반 교통 방해죄로 처벌하기 시작했다. 신고 집회일지라도 예정되지 않은 육로 등을 행진하는 행위는 '기타 방법'으로 교통을 방해한 자에 해당한다는 이유였다.<br/><br/><strong> 단순 집회 참여자에 대한 일반 교통 방해죄 적용의 문제점</strong><br/><br/>원래 집회란 그 본질상 당연히 다수의 위력을 수반하고 도로 교통의 방해가 일부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헌법이 집회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은, 집회의 자유를 통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닌 것이다.<br/><br/>다시 말해, 집회로 인한 도로 교통의 일시적 제약은 용인해야 한다는 것이 헌법적 가치에 충실한 해석이 될 것이고, 헌법에 부합하도록 법률의 해석과 집행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2008년 촛불 집회 이후 일부 집회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경찰로 하여금 집요하게 채증하게 하고(집회 현장에서 일부 경찰은 광각 카메라를 이용하여 참가자 가운데 간부급의 얼굴을 촬영한다), 이들을 대상으로 기소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교통 방해죄로 검거된 범죄자 수는 2006년 불과 806명에서 2014년 1654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br/><br/>수사 기관의 법 집행이 불공정했던 것은, 동일한 육로를 이용한 참가자 중 일부 간부급만을 선별 기소한 것에서 나아가, 집회 참가자들에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 아닌 일반 형법을 적용하여 처벌을 중하게 했던 점도 있었다. 형법상 일반 교통 방해 죄는 그 법정형이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써, 집시법의 단순 집회 참가자에 대한 법정형 50만 원의 벌금에 비해 가중 처벌하기 때문이다.<br/><br/><strong> 일반 교통 방해죄 적용의 결과</strong><br/><br/>검찰의 기소에 따라 단순히 도로를 행진했던 이들이 형사 재판에 피고인으로 소환되면, 이후 재판이 진행되는 수개월 동안 회사에 연달아 연차를 내거나 수업을 결석해야 한다. 몇 건의 형사 재판에 연루되면 지방 법원 곳곳에서 소환되는 통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을 정도다.<br/><br/>실제로 내가 변호했던 시민 단체 간사와 학생회 간부 등이 그런 피로감을 호소했다. 단순히 행진을 했던 집회 참여 사실에 따라 벌금 수십만 원부터 수백만 원에 이르는 선고를 받고 벌금을 납부하고 나면, 이들이 집회 적극 참가자에서 '순한 양'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개인적으로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에 해당하고, 사회적으로는 형벌의 목적인 특별 예방주의가 달성되는 것이다(형법 교과서는 형벌이 사회 일반인의 범죄를 방지하려는 일반 예방주의와 범죄인 개인에 대한 범죄 예방 효과를 위한 특별 예방주의로 기능한다고 설명한다).<br/><br/>수년간 지속된 집단적이고 누적적인 법 집행의 효과는 적극 참가자들의 규모를 줄어들게 했을 것이다. 적극 참가자들의 감소 현상은, 그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폭력 시위대의 수를 축소시켰고, 이들이 집회 현장에서 점점 더 보기 힘들어졌을지도 모른다.<br/><br/>외신들도 놀랐던 광화문 집회의 질서정연한 100만 군중의 모습에는, 우리 집회 참가자들의 정치적 결벽성뿐만 아니라 지난 수년간 집요했던 수사 기관의 법 집행이 자리하고 있는 것 아닐까?<br/><br/>나는 변호사로서 폭력이 난무하는 집회를 기대하거나 그것을 결코 장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무익하고 개인적으로 지루한 일반 교통 방해 피고인의 형사 사건이 내 주변에서 발생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다만, 100만 군중에서 단 스물세 명의 연행자가 발생한 이 '사건'을 설명하는 데 검찰과 경찰의 저 끈질기게 지속된 수년의 노력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뿐이다.<br/><br/>나의 미흡한 가설은 보다 정확한 연구와 조사에 따라 수정되거나 보충되어야 할 것이다. 프랑스 사회학자들은 대규모 항의가 조직되는 집회 현장에 나가, 현장에서 100여 명의 학자들이 직접 투입되어 시위 참가자들을 면접하고 분석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도대체 논자들의 인상 비평 말고는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br/><br/>2016년 인구 1000만의 수도 서울에서 100만 명이 넘게 참여한 대규모 얌전한 군중집회가 '발생'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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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quot;수사 받기 전, 휴대전화부터 없애라!&quot;</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1020-14291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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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0 Oct 2016 00:59:31 GMT</pubDate>
      <description>얼마 전 한 친구와 스폰서 유착 혐의로 구속된 부장검사에 대해 한담을 나누었다. 친구는 부장검사가 수사를 받으며 자신이 갖고 있던 여분의 휴대전화를 &apos;잃어버렸다&apos;고 진술한 것...</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얼마 전 한 친구와 스폰서 유착 혐의로 구속된 부장검사에 대해 한담을 나누었다. 친구는 부장검사가 수사를 받으며 자신이 갖고 있던 여분의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고 진술한 것에 대해, 어떻게 현직 검사가 그렇게 비겁할 수 있느냐고 비난했다. 실제로 언론 보도를 보면, 수사 팀이 검사의 사무실 등을 압수 수색했으나 휴대전화를 찾지는 못한 것 같다(그가 정말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것일까?).<br/><br/><strong> 검사인 피의자는 자신의 죄를 고해야 하는가</strong><br/><br/>이 그림은 묘하다. 검찰의 일원이자 중간 간부인 부장검사가 핵심 증거를 제출하지 않은 장면을 두고,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인의 감상으로 보인다. 이렇게 질문해보자. 비록 피의자라 할지라도 검사가 수사를 받을 때에는, 조직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수사에 협조해야 하는가?<br/><br/>결코 그렇지 않다. 현직 검사이기에 앞서 수사를 받는 피의자는 '자기부죄거부권(自己負罪拒否權)'을 향유하는 시민이기 때문이다. 자기부죄거부권이란 "누구도 자기 자신의 죄를 인정할 의무가 없다"는 원칙 아래, 유죄를 인정하는 데 수사에 협력할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자기부죄거부권은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을 헌법상 기본권인 진술 거부권, 이른바 묵비권과 해석상 연결된다).<br/><br/>이제는 구속된 부장검사가 수사를 받으면서 뇌물 관련 혐의를 얼마나 인정하고 부인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아가 그의 혐의를 비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직 검사일지라도 스스로 자기 죄를 고해 바칠 의무는 없다는 점이다. 물론, 검사로서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나는 알지 못한다. 변호사로서 강조할 만한 사실은, 그의 신분과 관계없이 수사의 대상이 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가 된다는 압도적인 현실이다.<br/><br/>수사 기관이 갖는 강제 수사권은 실로 막강하다. 법원의 영장을 통한 것이지만, 압수 수색을 받는 순간 피의자는 그와 관련된 모든 사실이 경찰과 검찰에 알려져, 속된 말로 완전히 발가벗겨지게 된다. 여론의 지대한 관심 덕인지 모르지만 현직 검사장, 부장검사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는 것이 현재 시점의 진실 아닌가. 이러한 막강한 수사 기관에 대항하는 피의자의 최소한의 권리가 바로 자기부죄거부권이다.<br/><br/>피의자의 휴대전화는 혐의 사실과 관계없는 개인의 모든 신상과 과거 행적, 발언에 관한 무궁한 정보가 담겨있는 핵심 증거 방법이다. 최근 수사 기관이 피의자를 강제 수사로 전환할 때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하는 제1순위 증거가 바로 휴대전화다. 피의자 신분이 되기 전 부장검사가 스폰서 친구에게 '제발 휴대전화를 바꿔 달라'고 간청한 것은, 자신의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전략이었다.<br/><br/>다만 검사가 친구에게 휴대전화를 없애달라고 한 행위는, 특수한 경우 증거 인멸 등 다른 범죄 행위가 될 수도 있다(조금 복잡하지만, 자기 사건의 증거 인멸은 범죄가 되지 않지만, 타인을 교사하여 자기 사건의 증거 인멸을 한 경우 교사범이 성립할 수 있다).<br/><br/>다시 여기서 세밀하게 구별해야 할 지점은, 자기 자신의 휴대전화를 숨기거나 감추어도 그것은 전혀 죄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헌법상 권리인 자기부죄거부권을 행사하는 지극히 당연한 행위라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해당 검사는 스폰서로부터 받은 향응 등에 대해 대가성이 없다는 항변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적어도 자기 죄의 증거를 제출하지 않을 권리는 이번 재판에서 공소 사실을 다투는 데 더욱 중요한 지점이 된다.<br/><strong><br/></strong><strong>헌법상 권리로서 자기부죄거부권</strong><br/><br/>근대 이전의 '원님 재판'을 생각해보자. 사극에서 보듯이, 사또가 '네 죄를 알렸다'고 소리치면, 곤장 맞을 자세로 심문을 받던 '죄인'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근세 유럽에서조차 고문이 피의자 신문에 합법적으로 행해지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의 형사 소송 구조는 피고인을 검사와 대등한 당사자로서 인정하고, 이를 통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게 되었다. 수사 기관에게 창을 준 후 피의자에게도 방패를 쥐어준 것이다.<br/><br/>나는 부장검사의 입장이 아닌, 그가 당연히 갖고 있는 헌법상 권리를 옹호하고자 한다. 모든 시민이 향유하는 것과 같이, 부장검사도 갖는 자기부죄거부권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검찰이 논두렁에 버린 시계 운운한 사실로 전직 대통령에게 씻을 수 없는 불명예와 모욕을 준 과거를 아직도 기억한다.<br/><br/>아픈 교훈은, 누군가를 단죄하는 시점은 그가 공정한 재판을 받은 이후에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정한 재판을 받을 피의자의 최소한의 권리-자기부죄거부권은, 검사와 파렴치범, 양심범을 구분하지 않고 동등하게 행사될 수 있어야 한다.</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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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버티고 버텨라! 절대로 사표 쓰지 마라!</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0907-14107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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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07 Sep 2016 01:18:14 GMT</pubDate>
      <description>회사는 상황이 어려워지면 노동자가 알아서 회사를 그만두길 원한다. 법률에 따른 정리 해고는 까다로운 요건을 갖추어야만 적법하기 때문이다. 회사로서는 노동자가 어려운 사정을 미...</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회사는 상황이 어려워지면 노동자가 알아서 회사를 그만두길 원한다. 법률에 따른 정리 해고는 까다로운 요건을 갖추어야만 적법하기 때문이다. 회사로서는 노동자가 어려운 사정을 미리 헤아리고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강제하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이 때 회사는 구조 조정 대상자를 선별하고 상사로 하여금 압박을 가할 수 있다.<br/><br/>노동자가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대기 발령 후 해고 예고 절차를 거쳐, 직접 해고할 수 있는 인사 정책을 통해 노동자로 하여금 사직을 '선택'하게 할 수도 있다. 노동자 역시 회사의 어려운 처지를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회사를 나가는 순간 자신의 삶 역시 거센 바람 앞 촛불과 같은 운명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밖은 지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면 노동자 입장에서는 최소한 버티는 기간만큼의 월급에 해당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긴 하지만 둘 사이의 힘겨루기가 시작되는 지점이다.<br/><br/>회사는 정리 해고 대상자를 선별한다는 소문에서 나아가, 구조 조정 대상자가 스스로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을 경우 대기 발령하고 추후 해고하겠다는 인사 방침을 실제로 공고를 통해 확정하고, 일부 노동자를 상대로 대기 발령까지 내린다. 대상자 가운데 한 노동자는 이에 어쩔 수 없이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해고된다는 회사의 인사 방침에 따라 사직서를 제출하고 퇴직금을 수령한다.<br/><br/>노동자는 사직서를 제출하고도 억울했다. 내가 왜 구조 조정 대상이 된 것인지 회사로부터 설명들은 바도 없고 대기 발령을 당하긴 했지만 근무 실적이 평균보다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표면적으로는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했으므로 이를 다툴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사직서 제출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던 것이 회사의 강압적인 인사 방침 때문이었다는 점이다.<br/><br/><strong> 사직서 제출 행위가 해고로 인정받기 위한 요건</strong><br/><br/>노동자는 근로 관계를 종료시킨 자신의 사직서 제출 행위를 뒤늦게 소송을 통해 다툴 수 있을까?<br/><br/>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동자는 사직서 제출 행위가 자신의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고 회사 정책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실질상 해고라고 주장할 수 있다. 대법원은 "사용자가 근로자로부터 사직서를 제출받고 이를 수리하는 의원 면직의 형식을 취하여 근로 계약 관계를 종료시킨다 할지라도, 사직의 의사 없는 근로자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사직서를 작성 제출하게 한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사용자의 일방적 의사에 의하여 근로 계약 관계를 종료시키는 것이어서 해고에 해당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위 판례에는 '비진의 의사 표시', '사기 강박에 의한 의사 표시' 등 민법의 법리가 전제되어 있다.)<br/><br/>판례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두 요소는, 첫째 노동자(근로자)에게 실제로 사직의 의사가 존재하지 않아야 하고, 둘째 사용자는 노동자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사직서를 제출하게 하는 경우여야 한다.<br/><br/>사직서 제출 행위 자체는, 노동자가 사직의 의사를 갖고 사용자를 상대로 일방적 통보를 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회사의 동의를 요하지 않으며 사직서 제출 후 1월의 기간이 경과하면 그 효력이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에게 '사직'의 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회사의 기망 행위(노동자를 회유 등으로 속이는 행위)나 강박 행위(노동자로 하여금 공포나 해악을 느끼도록 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사직서를 제출하게 한 경우에는, 노동자가 외형상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해고'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대법원의 태도다. 이 경우 비록 사직서를 제출한 노동자라고 할지라도, 노동자에게 정당한 해고에 준하는 사유가 존재하는지는 회사가 입증 책임을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br/><br/><strong> 희망 퇴직의 실시에 따라 사직서를 제출하는 경우</strong><br/><br/>다만, 노동자가 어쩔 수 없이 회사의 인사 정책에 따라 사직서를 제출하는 행위가 모두 조건 없이 '해고'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회사가 희망 퇴직제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당시 또는 앞으로 다가올 피고 회사의 어려운 상황을 다소 과장하거나 위 퇴직 권유에 응하지 않을 경우 어떤 불이익을 입을 수도 있다는 취지의 설명을 하였다는 사정"만으로는, 회사가 어쩔 수 없이 노동자로 하여금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기망하거나 강박하였다고 볼 수 없다는 판례도 존재한다.<br/><br/>앞선 판례와의 중요한 차이는, 회사의 인사 정책이 실제 어느 정도로 노동자의 사직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쳤느냐 하는 점이다. 따라서 실제 노동자가 회사의 보이지 않는 강압에 따라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하더라도, 해고로 이를 다투어 인정받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br/><br/>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어쨌든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다면 버티는 것, 그것이 노동자에겐 가장 유리한 권고사직 대응법이다.</p>]]></content:encoded>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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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정말로 만졌을까?</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0824-14045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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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3 Aug 2016 23:10:53 GMT</pubDate>
      <description>얼마 전 강제 추행 죄로 기소되었던 의뢰인이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검찰이 기소한 사건에서 무죄를 받는 경우는 통계적으로 얼마나 될까? 놀라지 마시라, 해마다 약간의...</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얼마 전 강제 추행 죄로 기소되었던 의뢰인이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br/><br/>검찰이 기소한 사건에서 무죄를 받는 경우는 통계적으로 얼마나 될까? 놀라지 마시라, 해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1~2% 정도에 불과하다. 재판 결과 100명의 피고인 가운데 무죄를 받는 자는 평균 한두 명에 불과한 것이다. 이 통계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검찰이 억울한 자를 쉽게 기소하지 않는다는 점과 함께, 기소된 이후 피고인이 무죄를 입증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해석이 가능하다.<br/><br/>다른 형사 사건의 경우도 그렇지만 특히 성범죄 사건에서 유·무죄 판단의 어려움은 증거의 부족으로부터 기인한다. 우리 의뢰인의 경우, '밤 10시경 강남역 이면도로 인근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던 피해자의 엉덩이를 손으로 한 차례 쳤다'는 행위가 기소된 범죄의 요지였다. 서울 강남 한복판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CCTV는 존재하지 않았다(CCTV가 있었다면 변호사조차 필요 없는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피해 사실을 주장하는 피해자의 증언이 거의 유일한 증거였다.<br/><br/><strong> 무죄 판단과 입증의 어려움</strong><br/><br/>증거 부족은 사실 성범죄 사건의 특징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는데, 당사자 외에 그 범죄 전후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가 없다는 밀행성 때문이다. 목격자는 없는 상황에서 가해자는 '나는 엉덩이를 치지 않았다'고 하는데, 피해자는 '가해자가 내 엉덩이를 쳤다'는 완전히 반대의 주장을 한다.<br/><br/>이 사건 쟁점은, 가해자의 실수가 아닌 한 '실제 피해자의 엉덩이를 손으로 쳤느냐' 하는 단 하나의 사실을 확정하는 것이었다. 재판 실무상 사실 확정을 위해 필요했던 것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진술 중 어느 것이 더 믿을 만한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br/><br/>경찰, 검찰 등 수사 기관에서 이미 진술을 했던 가해자와 피해자는, 법정에 나와 다시 같은 질문을 받고 당시 상황에 대해 증언해야만 했다. 변호인으로서 나는 당시 정황을 최대한 상세하게 판사 앞에서 '재연'에 가까운 정도로 질문을 던지고, 사건 전후에 대한 피해자 진술의 약점을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br/><br/>의뢰인으로부터 사건을 위임받으면서, 당시 정황을 '가해자 입장'에서 매우 상세하게 이미 들었던 상황이다. 내가 의뢰인의 말을 100% 신뢰했던가? 증거가 부족한 사건에서 변호인은 자신의 의뢰인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그가 말하는 사실과 정황을 회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회의적 태도가 의뢰인에게 더 유리한 결과로 이어진다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 의뢰인의 주장에서 보이는 허점을 찾고 미리 그것을 방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회의적 태도는 오히려 정당하다. 반대로 의뢰인의 주장을 전부 신뢰하는 변호인의 변론은, 재판에서 검사로부터 더 쉽게 공격당하고 판사로부터 의심을 살 수 있는 여지가 더 클 수 있다.<br/><br/>당시 의뢰인은 '나는 피해자 엉덩이를 손으로 치거나 만지지 않았다' '전단지를 나눠주려는 피해자를 밀쳤을 뿐이고, 그 와중에 혹시 접촉이 있었다면 피해자의 엉덩이가 아닌 상체 부근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었다'. 피해자를 증인 신문하면서, '전단지를 나눠주려 하는 피해자가, 이를 수차례 거부하는 가해자를 따라왔고, 결국 가해자가 전단지를 건네주려던 피해자의 손을 밀치다가 원하지 않게 피해자 신체 부위 일부에 접촉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인지 여러 각도에서 질문했다.<br/><br/>피해자가 당시 상황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믿을 만하게 기억하는지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질 것이었다. 어려운 신문이었지만, 여전히 나는 1심에서 피해자의 증언이 법대 위에 앉은 법관을 얼마나 움직였는지 알 수 없다. 무죄 판결에는 증인 신문 이외에도 너무 많은 판단 요소들이 작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br/><br/><strong> 재판 혹은 인간적 고뇌</strong><br/><br/>법관 입장에서 이 사건을 보면 어떤가. 나는 비록 의뢰인의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인의 입장이었지만, 이 사건의 판사는 훨씬 많은 고뇌와 인간적 괴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변호인은 직업적 윤리와 의무에 따라 의뢰인의 입장에서 가장 유리한 변론을 하고, 검사는 수사 결과에 의해 기소하고 피고인의 유죄 판결을 받아내기 위해 노력한다.<br/><br/>재판에서 변호인과 검사는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지만, 판사는 그렇지 않다. 법관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무죄라고 판단할 경우 피해자에게, 유죄로 결론내릴 경우 피고인에게 각각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힐 수 있다.<br/><br/>어느 누가 법관을 '권력을 행사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지만, 판결에 앞서 인간적 고뇌는 피할 수 없으며 그것은 판사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법정에서 우리와 같은 시민인 법관이 다른 시민을 상대로 유, 무죄를 선고하는 장면에는 어떤 엄숙함이 스며들 수밖에 없다.<br/><br/>이 사건에서 판사는 피고인이 피해자의 엉덩이를 손으로 쳤다는 사실에 대해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고, 당시의 전후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피고인에게 추행의 고의가 없었다는 판단 아래 무죄를 선고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사건에 대해서는 판사뿐만 아니라, 검사와 변호인도 '실체적 진실'을 모른다고 해야 한다. 형사소송법 제1의 원칙인 실체진실주의는 인간의 한계를 넘을 수 없으며, 우리의 재판도 그 한계가 명확한 것이다.<br/><br/>그렇다고 하여 이 재판이 잘못된 결론을 내린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재판을 통해 확정한 최선의 결론이자 '잠정적 진실'은, 피고인이 고의로 피해자의 엉덩이를 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의뢰인은 무죄를 받을 수 있었다.<br/><br/>(며칠 전 검사가 1심 판결에 항소하여 '진실'은 여전히 유보되었다.)</p>]]></content:encoded>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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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절대 사표 내지 마라! 대신 녹음을 하라!</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0713-139001</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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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3 Jul 2016 00:11:29 GMT</pubDate>
      <description>구조 조정, 권고사직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권고사직 권유 행위 자체가 이미 회사의 집단 &apos;괴롭힘&apos; 행위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로, 회사는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대상자를 &apos;자...</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구조 조정, 권고사직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권고사직 권유 행위 자체가 이미 회사의 집단 '괴롭힘' 행위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로, 회사는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대상자를 '자발적으로 퇴사시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접근한다.<br/><br/>2년 전 대규모 권고사직을 통해 '명예퇴직'을 단행한 대기업 노동자의 생생한 육성이다.<br/><br/> "명퇴를 권유할 때 OO(회사 이름)의 모습은 살아있는 지옥의 모습(입니다). 이번에 2주 정도 (사직 면담을) 했거든요. 매일 1시간에서 2시간씩 면담을 합니다. 나는 그대로인데 면담자는 계속 바뀌지요. 지사장, 팀장, 지부장…. 노사협력팀에서도 나오고. 로테이션으로 계속합니다. 나는 안 바뀌는데 상대는 계속 바뀌어요. 그걸 2주를 합니다. 그들은 특별하게 트레이닝 받은 사람이에요. 심리적으로 법적으로나."<br/><br/>어느 누가 이 면담 지옥을 견딜 수 있을까? 용케 그 압박을 견디고 사직 권유를 거부했다고 하더라도 그 뒤를 잇는 것은 조직적인 괴롭힘이다. 사실 괴롭힘에 앞서, 대상자로 선정된 순간 자신을 온전하게 지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회사가 제시하는 일부 보상금을 받고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직 가능한 나잇대의 능력 있는 노동자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다.<br/><br/><strong> 사직서 제출 후 철회가 가능한가</strong><br/><br/>그렇지 못한 노동자가, 저 압박감을 순간 견디지 못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하자. 그 뒤에 바로 후회가 밀려와 사직서 제출을 철회할 수 있을까?<br/><br/>사용자가 사직(퇴직)을 권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망 내지 강박 행위로 노동자가 '사직의 의사 없이' 사직서를 제출한 경우에는 실질적인 해고에 해당할 수 있다. 사직서 제출 철회를 논하기에 앞서, 이 경우는 해고가 정당한 것인지 다툴 수 있게 된다(근로기준법 제23조). 다만 실무에서는 노동자가 '어쩔 수 없이' 사직서를 제출한 경위를 자신이 입증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실제로 사용자는 매우 교묘하게 사직서 제출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용자의 기망이나 강박 행위를 노동자가 입증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br/><br/>실제 노동자가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은 일방적인 의사 표시로서 사용자의 승낙을 요구하지도 않으므로, 근로자의 사직 의사 표시가 사용자에게 도달하면 그 철회가 불가능한 것이 일반적이다. 다시 말해, 사용자의 집요한 사직 권유에 사직서를 제출한다면 해당 노동자는 이를 해고에 준하여 다툴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br/><br/>이 원칙에 대한 예외는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사직서를 제출한 후 사용자가 선별적으로 사직서 수리하는 행위다. 이런 행위를 놓고는 사직서 제출 행위가 사직의 의사 표시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판례가 존재한다.<br/><br/>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노동자가 사직서를 제출하는 순간, 이를 소송으로 다퉈서 승소하기는 매우 어렵다. 어쨌든 이론과 달리 현실에서는, 노동자가 회사에서 권고사직 대상으로 선정된 경우에는 조용히 짐 싸 들고 나갈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 잃을 게 없는 노동자라면, 부양해야 할 가족을 생각해 좀 더 긴 싸움(소송)을 준비해보자.<br/><br/>권고사직 거부 후, 회사의 괴롭힘을 지속해서 당할 때, 괴롭힘 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조용히 증거를 수집해야 한다(아래는 <일터 괴롭힘, 사냥감이 된 사람들> '보론'을 참고, 인용했다).<br/><br/><strong> 몇 가지 증거 수집 사례</strong><br/><br/>먼저, 피해자는 가해자의 가해 행위를 낱낱이 기록해야 한다. 가해 행위는 일자, 시간, 날씨, 가해자가 입었던 옷 등 당시의 일을 모두 기록할 수 있어야 하고, 가해자가 모욕적인 언사를 했을 경우, 구체적으로 그 말을 기록해둘 필요도 있다.<br/><br/>추후 법정에서 제3자의 증언이 필요할 때, 증인에게 단순히 '가해자가 모욕적인 말을 피해자에게 했습니까'라고 묻기보다, '그날 피해자에게 밥값도 못 하면서 밥 먹는다는 취지의 말을 했나요'라고 물을 경우에 유리한 증언을 끌어낼 수 있다.<br/><br/>피해자는 가해자의 모욕적 언사나 폭언을 기록하기에 앞서 그 말을 적극적으로 녹음할 필요도 있다. 피해자의 기록은 때에 따라 소송에서 증명력(쉽게 말해, 어떤 사실을 입증하는 정도나 쓰임새)이 낮을 수 있다. 기록 자체는 엄연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괴롭힘 현장을 고스란히 담은 녹음 파일은, 그 전후 맥락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기록보다 높은 증명력을 갖는 경우가 많다.<br/><br/>일반인은 상대방과의 대화를 '몰래' 녹음하는 것을 모두 위법하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현행 통신 비밀 보호법은 대화자(가해자-피해자) 사이의 녹음은 허용하지만, 제3자의 내용을 몰래 녹음하는 경우에는 처벌하고 있다. 따라서 피해자가 가해자의 폭언을 녹음하는 것은 통신 비밀 보호법상 위법 행위가 아니다. 이러한 녹음 행위와 함께, 피해자는 가해 행위의 입증을 위하여 회사 내 문서, 이메일, 문자 메시지, 사진 등 객관적 증거를 치밀하게 확보해야 한다.<br/><br/>이상과 같은 증거 수집을 통해, 피해자가 회사와 가해자를 상대로 직장 내 괴롭힘을 불법 행위로 하는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노동자에게 현실적인 대안이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소송에서 승소하더라도 피해자인 노동자가 얻을 수 있는 경제적인 이익이 얼마나 될지도 가늠하기 어렵다(실무에 축적된 사례가 많지 않다). 또한, 회사에 적을 두고 있든 그렇지 않든 소송을 진행하면서 노동자가 받을 정신적 고통은 매우 클 수밖에 없다.<br/><br/><strong> '직장 내 괴롭힘 방지 특별법'을 위하여</strong><br/><br/>조직 내에서의 괴롭힘 행위를 제도적으로 방지하고, 구조적으로 이를 예방할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국회를 통해 '직장 내 괴롭힘'을 보다 상세하게 규정하고 이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 이미 프랑스는 2002년 노동법과 형법에서 '정신적 괴롭힘'을 규율하고 처벌하고 있으며, 캐나다 일부 주에서도 2004년 노동기준법을 개정하여 관련 규정을 정비하여 시행하고 있다.<br/><br/>그 자체로 직장 내 괴롭힘의 주요한 유형인 '성희롱'에 대한 개념은, 우리 사회에서 1990년대에 들어서야 공론화되었고, 현재 '남녀 고용 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법률 안에 성희롱 금지를 담은 조문들을 갖고 있다.<br/><br/>"제12조(직장 내 성희롱의 금지) 사업주, 상급자 또는 근로자는 직장 내 성희롱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br/><br/>우리 노동자들이 의무적으로 연 1회 비디오 예방 교육을 수강하거나 전문 강사의 교육을 받는 것은 바로 위 법률에 따른 것이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서도 이를 막는 구체적인 사례를 방지하는 조항을 만들고 이를 처벌하는 내용을 법률로 만들 수 있다면, 미흡하지만 성희롱을 방지하는 남녀 공용 평등법만큼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br/><br/>물론, '직장 내 괴롭힘 방지 특별법'의 제정과 시행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어떤 직장 내 괴롭힘이 문제 되고 있고 그 정확한 정의를 어떻게 할 수 있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모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더 활발하게 토론하는 과정을 거치고, 이후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문제 해결에 한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br/><br/><strong> 회사는 가족이 아니다</strong><br/><br/>언젠가부터 회사는 우리에게 조직을 유사 가족으로 받아들이라고 설득해 왔다. 힘없는 종속 노동자인 우리는 신입사원 당시부터 회사가 주입하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내면화하고(속으론 비웃을지라도), 가족을 버리고 조직에 충성해왔다. 충성의 기간이 늘어나도 보장받는 미래는 불확실했으며, 우리는 경쟁적으로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br/><br/>그런 일상을 보냈음에도, 전장에서 장렬히 패배한 기업들은 장수와 병들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있다(조선, 해운업 노동자들을 보라). 2016년 자본주의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이 냉혹한 현실을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다만, 조직이 우리에게 달콤하게 주입했던 '가족처럼 일하자'는 설득은 이제 명백한 거짓말임을 확인하자. 우리가 사용자와 체결한 근로관계는 본질에서 '계약'임을 인식하고, 계약에 따른 책임을 상호 간에 요구하자.<br/><br/>우리들의 그 뒤늦은 확인들이, 앞으로 더 많이 패배할 회사들에서 일방적으로 희생당하고 인간적으로 배신당하는 것을 아주 조금이라도 막아 줄 수 있지 않을까. 망해갈 회사들은 권고사직의 꼼수를 부려 노동자들을 인격적으로 파괴하지 말고,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정리해고를 진행하면 될 일이다. 우리는 원래부터 같은 가족이 아니었으니까.</p>]]></content:encoded>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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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왜 최연소 대기업 임원은 목숨을 끊었을까?</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0629-138416</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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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8 Jun 2016 23:02:12 GMT</pubDate>
      <description>회사 인간 : 새로운 작은 사람의 등장  한국에서, 고통 없는 회사 생활이 가능할까? 회사 생활의 고통은 매우 불평등한 것이어서, 정확히 직급에 따라 분담되고 정해진다. 사원...</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rong>회사 인간 : 새로운 작은 사람의 등장</strong><br/><br/>한국에서, 고통 없는 회사 생활이 가능할까? 회사 생활의 고통은 매우 불평등한 것이어서, 정확히 직급에 따라 분담되고 정해진다. 사원과 부장이 조직을 경험하고 느끼는 방식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일반적인 회사 조직은, 오직 부장 이상의 직급에게 최적화되어 있고 그 이하 직급에게는 고통을 강요하고 있다.<br/><br/>부장은 회사가 자신의 몸에 꼭 맞는 맞춤 정장과 같다. 그들이 하는 일은, 낮엔 빨간 펜을 들고 부하들이 들고 오는 기안문을 수정해 주고, 밤엔 그들을 데리고 술집에 가는 것뿐이다. 불가능한 데드라인을 지키지 못한 부하를 상대로, 조직에서 키운다는 명목으로 폭언과 강제 음주가 횡행하지만 이는 '갈굼의 리더십'으로 정당화된다. 인생에 어떤 어려움이 있겠는가. 승진 탈락과 몇 년 전에 선 '줄'의 안위만이 걱정될 뿐이다.<br/><br/>간신히 버티고 있는 사원, 대리, 과장이야 말로 회사 조직의 '밑바닥 인생'이다. 그들에게 근로기준법이 중요한가? 천만의 말씀. 밑바닥 인생에게 대통령이 바뀌는 정권 교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이듬해 상사의 인사 이동 결과다. 지켜지지도 않을 대선 공약보다 나의 일상을 180도 변화시킬 상사의 캐릭터 종류가 백 배는 더 중요하다. 찰스 라이트 밀스가 말한 '새로운 작은 사람(new little man)'을 거부할 길이 있을까? 어느 조직에서건 3년만 밑바닥에서 구르면 순한 양이 되기 마련이다.<br/><br/>점심시간에 만나는 여의도, 종로, 강남 길거리의 회사원들 얼굴은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점심시간이니까!). 그러나 사무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일상이 긴장으로 가득 차 있고 시시때때로 폭력이 난무하는 장면이 작업장의 진실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br/><br/><strong> 김 검사와 대기업 임원의 모멸감</strong><br/><br/>지난 글에서 소개한, 자살한 김 아무개 검사는, 상사인 부장검사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고충을 주변에 지속적으로 호소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 검사는 "부장검사에게 매일 욕을 먹으니 한 번씩 자살 충동이 든다. 술자리에서 내내 닦였다"거나 "(부장검사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웃으면서 버텼는데 (내가) 당당하다고 심하게 욕설을 했다. 너무 힘들고 죽고 싶다"고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에게 전화해 펑펑 울다가도 "괜찮다. 이겨내겠다"고 말하고 나서, 며칠 후 비극적으로 자살했다.<br/><br/>그의 영혼에 평화가 깃들기를 다시 한 번 기원한다. 그가 받았을 모멸감은 무엇이었을까? 그 질감을 가늠할 수 없지만, 나 역시 5년의 회사 생활 동안 비슷한 감정을 여러 차례 느꼈다. 회사와 회사를 몸으로 구현한 상사는 부하 직원에게 한없이 냉혹할 수 있다. 부하 직원의 직급이 낮을 필요도 없다. 경우에 따라 임원조차 조직으로부터 가혹한 괴롭힘을 당하기도 한다.<br/><br/>겉으로는 더없이 '잘나가는' 듯 보였지만, 실제 그의 생활은 전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끝없는 실적 압박과 회사 내 파벌 싸움에서 오는 시기, 질투에 괴로워했지만 그에게 손을 내미는 이는 없었다. 부인과 두 자녀를 둔 가장이자 회사 내 최연소 임원으로 승진한, 성공했던 46살 가장은 결국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낀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법원은 그의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 합병된 3사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은 파워콤 출신인 그는 입지가 좁았고, '회사 내 주류'인 텔레콤 출신이 직속 상사인 본부장으로 부임하면서 그런 현상은 더 강화됐다. 새 본부장은 이 씨를 배제한 채 부하 팀장들에게 직접 업무 지시를 하기도 했다. 견제에는 시기와 질투도 따랐다. (…)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든 그는 팀장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고 '그동안 회사와 집만 다니고 취미나 다른 일이 20년간 없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평소와 달리 아내에게 '힘들다. 안아 달라'고도 했던 그는 2012년 8월 10일 처남에게 "우리 아이들과 처를 잘 부탁한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 뒤 이른 아침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했다. (☞관련 기사 : <a target="_blank" rel="noopener noreferrer external" class=null h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07703.html" title=null>잘나갔던 최연소 임원 비극 부른 '사내 따돌림'</a>)<br/><br/><strong> 폭언과 따돌림 : 심리적·정신적 괴롭힘</strong><br/><br/>김 검사와 대기업 임원의 자살에는 직속 상사의 폭언과 따돌림이 각각 자살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폭언과 따돌림은, 직장 내 괴롭힘의 대표적인 심리적, 정신적 괴롭힘의 행위 유형이다. 피해자를 정서적으로 학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해자의 사생활을 공격하거나 직장 조직에서 배제하고 추방하기까지 한다.<br/><br/>엄격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화이트칼라 직군에서 심리적, 정신적 괴롭힘이 주된 유형이라면, 블루칼라 작업장에서는 신체적, 물리적 괴롭힘 사례가 더 많다. 제조업 공장에서 노동자에게 행해진 군대식 노무 관리와 얼차려 폭력은, 1980~90년대 노동조합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매우 일상적인 것이었다.<br/><br/>직장 내 괴롭힘은 공개적이거나 은밀하게 진행되는데, 통상적으론 두 유형이 동시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직장 내 괴롭힘의 유형과 사례는, 최근 발간된 <일터 괴롭힘, 사냥감이 된 사람들>(코난북스 펴냄) 제3장을 참고, 인용했다). 처음엔 피해자가 은밀하게 작업장 내에서 동료 집단으로부터 고립되다가(대화나 인사하지 않기, 정보 전하지 않기), 그를 대상으로 언어적 위협 등의 괴롭힘이 진행되고, 결국 공개적으로 망신 주기에 이르기도 한다.<br/><br/><strong> 직장 내 괴롭힘의 내용적 분류</strong><br/><br/>직장 내 괴롭힘의 내용에 따른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조직적, 환경적 괴롭힘 ② 업무 관련 괴롭힘 ③ 대인간 괴롭힘이 그것이다.<br/><br/>조직적, 환경적 괴롭힘은 업무 관련 괴롭힘과 관련 있으며, 억압적인 노동 관리, 상사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리더십, 사생활 침해, 권고사직 뒤의 경영 전략으로서 구조적인 괴롭힘 등의 형태로 드러난다.<br/><br/>업무 관련 괴롭힘은 과중한 업무 압력, 매출 압박, 비합리적 데드라인, 과도한 업무 감시, 의견과 견해 무시하기, 반대로 의미 없는 과제를 부여하거나 일을 전혀 주지 않기, 본 업무를 박탈하고 주변적인 업무를 지시하기 등이 대표적인 유형이다. 마지막으로 대인간 괴롭힘은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리더십의 폭군형 상사와 결합되어 모욕적인 언사로 연결된 경우를 들 수 있다.<br/><br/>어떤가? 평소에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상사와 동료의 행위가 '괴롭힘'으로 분류될 수 있지 않은가? 회사에서의 비인간적 행위를 재확인하고 그것을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작이다. 그럼에도 피해자 개인의 대응은 미약할 수밖에 없다.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br/><strong><br/></strong><strong>괴롭힘을 당할 때, 구경꾼을 조직하고 광장으로 나가자</strong><br/><br/>회사는 지극히 폐쇄적인 곳이고 동시에 안정 지향적인 곳이다. 직장 내 괴롭힘이 회사의 공식적인 의사 결정 과정에 따라 해소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인사 부서에 진정을 하거나, 상사의 상사에게 괴로움을 호소하더라도 피해자가 구제받기는 매우 어렵다. 구조적인 문제는 언제나 개인적 갈등으로 치환되고, 이는 폐쇄적인 회사 조직-특히 인사 부서-의 기본 전략이기도 하다.<br/><br/>노동자는 사소한 듯 보이는 개인적 문제를 공동체의 문제로, 사회적 문제로 확전시켜야 한다. 정치의 영역에서 학자들이 약자들로 하여금 갈등의 구경꾼인 참여자들을 조직하라는 조언은, 회사 안에서도 유효하다. 회사야 말로 가장 정치적인 곳 아니던가. 내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징후가 조금이라도 보일 경우, 이를 해소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아가야 한다.<br/><br/>그것은, 회사 상사들이 마련한 사내 상담-정신건강센터가 아니라, '우리 편'이 많이 모인 곳이다. (다음 편에서는 권고사직에 대처하는 노동자의 구체적인 대응 방법을 얘기해 본다.)</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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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왜 33세 검사는 목숨을 끊었을까?</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0615-13786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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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4 Jun 2016 22:44:51 GMT</pubDate>
      <description>권고사직 후에 오는 것들, 특히 &apos;직장 내 괴롭힘&apos;을 살펴보기 전에, 나는 회사가 갖는 일반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다.  직장 내 괴롭힘의 양상은 바로 우리 사회-회사의 문...</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권고사직 후에 오는 것들, 특히 '직장 내 괴롭힘'을 살펴보기 전에, 나는 회사가 갖는 일반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다.<br/><br/>직장 내 괴롭힘의 양상은 바로 우리 사회-회사의 문화적 배경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바로 회사 문화는 직접적인 괴롭힘의 여러 요소를 이미 품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거칠게 얘기해서 직장 내 괴롭힘의 문화적 뿌리가 '회사 인간' 이외의 인간형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독재'와 맞닿아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br/><br/>다음 기사를 보자.<br/><br/>서울XX지검 형사 2부 김모(33, 사법연수원 41기) 검사가 (2016년 5월) 19일 오전 서울 양천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날 시신을 수습한 서울 양천경찰서는 자필로 수첩에 쓴 2장 분량의 유서에 "업무 스트레스로 힘들다"는 등 일이 많아서 힘겹다는 내용이 반복해서 나왔다고 밝혔다.<br/> <br/> (…) 지난 해 4월 서울XX지검에 부임한 김 검사는 그해 지검에서 마련한 '신임 검사 부모님 초청 행사'에 어머니를 모시고 참여할 정도로 검사에 대한 자부심이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 미제 사건이 쌓이고 상사의 업무 지시 등에 스트레스를 받아 주변에 힘겨움을 하소연해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관련 기사 : <a target="_blank" rel="noopener noreferrer external" class=null href="http://news.donga.com/3/all/20160520/78199609/1" title=null>2년차 검사 "업무 스트레스로 힘들다" 목매 숨져</a>)<br/><br/><strong> 한 젊은 검사의 자살이 말해주는 것</strong><br/><br/>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가 나와 같이 2012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해 이제 5년차에 접어 든 젊은 법률가였다는 점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왜 김 검사는 목숨을 버리기 전에 검사직을 때려치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br/><br/>좋은 학부에 이른 사법 시험 합격, 군법무관 복무 후 검사 임용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꿈에 그리던 검찰청에 입성했던 김 검사. 그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던 전도유망한 법률가였다. 그런데, 불과 1년 남짓한 검사 생활의 끝을 자살로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들이 보면 사소했을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br/><br/>고인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그는 어쩌면 남들이 보는 자신의 지위와 체면을 깊이 내면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끔찍한 결론을 내리기 직전에도 손에 쥔 것-검사직-을 결코 내던지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br/><br/>그가 자신이 가진 것을 던지지 못하고 오히려 그 자신을 파괴했던 내면의 풍경은, 김 검사만이 가진 고유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이미 무수히 많은 '김 검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업무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나약하게' 검사를 사직하는 것에 대해 그는 부모님을 비롯하여 친척, 친구들에게 뭐라고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br/><br/>회사를 당장 때려치우면 되는데, 그렇게 하고 나면 자신이 너무 초라해진다. 한편으로, 현재 부여된 과중한 업무는 자신의 역량으로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거대한 벽으로 느껴진다. 업무 스트레스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함 속에 매일 밤 잠 들 수도 없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간 회사(검찰청)에는 거대한 기록 더미가 책상 위에 가득 쌓여 있고, 매일같이 피의자들이 검사실에 쳐들어와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검사가 무소불위의 권한만 갖고 책임지지 않는 권력을 행사한다고 오해하지만, 대한민국 검사 가운데 어느 누가 자신을 스스로 권력자라고 생각하고 일을 할까. 밀린 업무를 허겁지겁 처리하는 그들 일상은 회사원과 99% 일치한다.)<br/><br/><strong> 단 하나의 삶의 모델 : 회사 인간</strong><br/><br/>그가 가졌던 고뇌가 많은 회사원의 가슴에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오늘도 '이게 사는 건가'라고 물으며 출근하는 우리들 마음과 닿아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죽음을 앞두고도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걸까?<br/><br/>하나의 가설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오직 단 하나의 삶의 모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20대에 대학을 나와 회사에 취직하고, 30대에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주택 담보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장만하며, 40대에 자녀 교육에 힘쓰고, 허락된다면 조직에서 계속 일하다 50대에 은퇴하여 노후를 보내는 삶 말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스스로 버리는 것은 그렇게 주어진 삶의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 된다. 저 삶을 관통하는 중심에는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하는 회사 또는 '회사 인간'이 있는 것이므로 이를 벗어난 삶을 상상하기는 어렵다.<br/><br/>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본 소득이 보장되지 않고, 그 어떤 사회적 안전망도 갖지 못한 한국 사회는, 회사-조직을 벗어난 순간 곧바로 루저(loser)로 전락하는 각자도생의 지옥이다. 학교 졸업 후 회사에 들어가는 선택지 이외에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어렵게 회사에 안착을 했더라도, 어떤 부적응으로 그 순간 회사를 나와야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저 많은 김 검사들은, 자신의 체면 때문에 혹은 경제적 문제 때문에(이제 변호사조차 먹고살기 힘들다) 결코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할 수 없다. 주위의 조언들은 온통 '조금만 더 버텨라', '다른 곳으로 가 봐도 다 똑같다'는 말 뿐이다.<br/><br/>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막 회사에 들어간 사회 초년생들은 가끔 비슷한 감정에 집단적으로 빠지곤 한다. 내가 그렇게 들어가고 싶었던 회사에 이제 당당하게 출근하게 되었는데, 아침에 회사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마치 거대한 장벽의 감옥 문을 스스로 여는 것과 같다는 느낌. 목줄에 걸린 사원증은 밖에서 보기엔 자부심의 상징이었지만, 이젠 스스로 떼어내지도 못할 만큼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고 나의 노예 신분을 '개목걸이'로 보증하는 것과 같은 느낌, 말이다.<br/><br/><strong> 쾌활하고 협조적인 부하만을 원하는 회사</strong><br/><br/>사람을 키운다는 회사는, 겉으로는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자신들의 인재상으로 '혁신, 창조, 창의, 열정, 도전' 등을 이야기 하지만 사실 조직 내에서 필요한 단 하나의 직원상은, 상사의 어떠한 '갈굼'과 '보복'에도 쾌활하고 협조적이며 생글생글 잘 웃는 얼굴들뿐이다. 그러한 문화적 독재에 저항하지 못하는 신입사원은 1년만 지나면 얼굴에 웃음기가 가시게 되고, 시간이 갈수록 충성-샐러리맨의 세계에 자신을 구겨 넣곤, 간절히 주말만을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다 가끔 '직장 사이코패스'인 상사라도 만나게 되면,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회사를 그만 둘 수도 없고, 그만두지 않을 수도 없다.<br/><br/>회사를 두 번 때려치운 선배로서, 이제 다시 조언한다. 조직-상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기분이 몇 년간 계속된다면, 월요일 출근이 두려워 토요일 밤부터 우울감이 계속되어 수개월 동안 잠들 수 없다면, 당장 사표를 내자. 회사 따위 잠시 쉬어도 상관없다. 나의 젊음과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br/><br/><strong> 종속 노동을 본질로 하는 근로 계약</strong><br/><br/>근로 계약을 체결한 사용자와 노동자의 근로 관계는 기본적으로 사용-종속 관계이다. 우리 노동법 역시 근로 관계(근로자성)를 인정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 표지로서 '종속 노동성'을 든다. 종속 노동성이란, 사용자가 업무 내용을 정하고 업무 수행 과정에서 사용자의 상당한 지휘 감독권이 인정되며, 이에 노동자가 사용자로부터 근무 시간과 장소에 구속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우리는 근로를 제공하고 사용자로부터 임금을 받는 '종속된 계약자'인 것이다. 그러한 종속 계약 관계가, 우리가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했던 회사와의 근로 계약의 본질이다.<br/><br/>그렇다면, 우리가 회사 때문에 건강을 잃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심지어 생명에 위협이 되는 순간에는, 바로 그 종속된 근로 계약 관계를 당장 해지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는 사용자와 달리 언제든지 사직의 통고를 할 수 있고, 사용자가 해지의 통고를 받은 날로부터 1월이 경과하면 근로 관계는 소멸한다(민법 제660조). 거꾸로, 사용자는 징계 해고와 정리 해고의 엄격한 요건을 갖출 때에만 정당하게 계약을 해지(해고)할 수 있다. 기억하자,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법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회적 우위에 있는 사용자를 제약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회법이다.<br/><br/>이제 근로 계약은 해지하면 그만이고, 노동자는 종속 계약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신성하게 여기는 결혼조차 계약에 불과하다(물론, 일방적인 해지가 불가능한 가족법상 계약이지만). 하물며 근로 계약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잠시 회사를 그만두고 심호흡을 해보자.<br/><br/>그러나 우리 역시 그렇게 쉽게 회사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할 책임이 있고, '흙수저'로 태어나 노동하지 않으면 먹지 못하게 되는 동물의 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도저한 한계를 이해한다. 다만,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내면의 퇴사 갈등에도 여전히 갈팡질팡 하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모델이 오직 회사와 관계된 것으로만 구성되어 있기 때문임을 강조하고 싶다. 가히 '회사 인간'만이 우리 사회에서 인정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회사 인간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br/><br/>이 인간형의 독재가 우리에게 어떤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 스스로를 파괴시킨다. 독재의 다른 진술은 다음과 같다.<br/><br/>"도대체 그 좋은 회사 그만두고 뭐 할 건대?" "늦은 나이에 대학원은 왜 들어가니, 공부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장사는 아무나 하나, 밖은 지옥이다." "3, 6, 9년차에는 다 그래, 조금만 더 버텨."<br/><br/>하지만, 저 조언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사실 당장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다(그리고 놀고 싶다!). 퇴사하지 못해 인생이 괴로운 자들이 좁은 사무실에 모여, 사소한 업무적 충돌로도 서로를 지옥으로 몰고 간다. 평등한 관계보다 상하 관계가 더 자연스러운 회사에서 상사의 한마디는 신의 그것과 같다. 부하는 어떠한 지시도 거부할 수 없고, 내 인생에 대한 통제권은 나에게서 완전히 멀어진 것만 같다. 저 갈굼과 핍박은 회사에 있는 한 내가 영원히 견뎌야 할 형벌이 된다.<br/><br/><strong> 직장 내 괴롭힘 : 보이지 않는 도착적 폭력</strong><br/><br/>이와 같은 사무실의 내부에서 직장 내 괴롭힘은, 그것을 당하는 피해자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다. 프랑스 정신과 의사 이리고양은 이를 '도착적 폭력'이라고 이름 붙였다(<보이지 않는 도착적 폭력>(최복현 옮김, 북프렌즈 펴냄)). 그 폭력이 도착적인 것은, 피해자들조차 회사 생활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과정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희생자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회사는 다 그래'). 거꾸로, 가해자들 역시 자신이 폭력을 행사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갈구면서 후배들이 크는 거지').<br/><br/>회사 밖을 생각하기 어려운 한국적 특수성은 가해자의 폭력을 점증시키거나, 피해자로 하여금 끝없이 폭력을 견디게끔 상황을 전도시킨다. 회사 인간이 또 다른 회사 인간에게 가하는 가학-피학의 연결 고리가 도착적 폭력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러한 직장 내 괴롭힘이 기업의 경영 전략과 결합하게 되면, 권고사직 뒤의 조직적인 폭력으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는 이 굴레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다음 편에 권고사직 후 직장 내 괴롭힘의 구체적인 유형과 대응 방법을 차례로 살펴본다.)</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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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절대 사표 내지 마라! 어차피 못 자른다!</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0601-13730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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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31 May 2016 22:44:07 GMT</pubDate>
      <description>지난 연재에서 사직을 권유받은 노동자는 사표를 내지 말고, 차라리 해고를 당하라는 조언을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직은 노동자가 스스로 퇴직하는 것이므로 부당 해고로 다툴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지난 연재에서 사직을 권유받은 노동자는 사표를 내지 말고, 차라리 해고를 당하라는 조언을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직은 노동자가 스스로 퇴직하는 것이므로 부당 해고로 다툴 여지가 없지만, 해고의 경우 근로기준법 등에 따라 그 요건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부당 해고를 다툴 수 있기 때문이다.<br/><br/>사표 내지 말고 해고를 당하자. 해고된 노동자는 집으로 돌아가자. 그동안 못했던 가사도 열심히 하고 아이와 놀아주자. 그리고, 해고 무효 확인의 소를 회사를 상대로 제기하는 것이다.<br/><br/>1심 판결이 나오기 까지, 짧게는 6~8개월 길면 1년이 넘게 걸릴 수 있다. 승소를 확신하는 노동자는 취미 생활을 할 수 있고 여전히 집안일을 할 수도 있다. 패소가 걱정된다면 단기 근로를 하면서 이직을 준비해 보자(소송 중 근로를 통해 얻은 경제적 이익은 승소 후 공제하면 그만이다).<br/><br/>승소 판결을 받게 되면, 원직으로 복직되고 실직 기간 미지급된 임금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다. 패소하면 어떤가? 미지급 임금을 받지 못할 뿐이다. 노동자가 잃을 게 무엇인가? 사실은, 노동자가 사표를 안낼 경우 회사가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뒤에 자세히 살펴본다).<br/><br/>그렇다 하더라도 작업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한 경우 노동자가 이를 거부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해고를 당했을 경우 소송으로 다투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사에 의해 강제로 근로 계약이 해지되고, 홀로 밖에 내던져지는 상황에 처하게 된 지금, 무엇이 두려운가?<br/><br/><strong> 근로 계약은 '계약'일 뿐이다</strong><br/><br/>나 역시 외국계 회사와 대기업에서 노동자로 수년간 일한 전력이 있다. 당시를 떠올려보면, 노동자 입장에서 회사 생활의 토대가 '근로 계약'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같다.<br/><br/>한 번은 이직을 위해, 다른 한 번은 진학을 위해 회사에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제출 순간 상사와 동료에 대한 미안함이 앞섰고 조직에 대한 배신행위가 없었음을 설명하기 위해 급급했다(도대체 배신할 게 또 무언가). 본인의 퇴사보다 조직원의 처지를 먼저 고민했다. 다른 한편 그것은 자신의 체면 문제이기도 했다. 당시 회사는 나에게 유사 가족이었기 때문이다.<br/><br/>그러나 2016년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가? 아무도 노동자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단독자다. 여전히 회사는 사용자와 노동자의 근로 관계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고, 계약은 해지하면 그만이다. 조직은 노동자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퇴사자만이 조직을 잊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어느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을까.<br/><br/>인사 팀과 상사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안다. 그들은 권고사직의 위기에 처한 당신의 자존심에 가장 먼저 상처를 낼 것이다. 일단, 권고사직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조직에서 씻을 수 없는 수치로 다가온다. 이어서 현업 부서의 상사와 부서장, 인사 팀 담당자와 구조 조정 본부장과의 면담을 정신없이 진행해야 한다.<br/><br/>정신 차릴 틈이 없다. 바로 이 때, 이 조언을 다시 기억하라. 절대 먼저 사표 내지 마라. 굴욕은 짧고 당신과 가족을 위한 퇴직금과 위로금, 나아가 승소했을 경우 받을 미지급 임금은 크다. 굳이 소송까지 가지 않더라도 버티면 버틸수록 회사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인센티브가 더 커질 수도 있다.<br/><br/>그런데 그렇게 버티다가, 회사로부터 결국 해고를 당하는 경우는 오히려 행복한 경우다. 권고사직을 거부한 많은 노동자에게, 그 뒤에는 무시무시한 '직장 내 괴롭힘'이 따르기 때문이다. 회사는 노동법 때문에 쉽게 노동자를 해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그래서 어떻게든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나가게 하는 수단으로써 직장 내 괴롭힘을 경영 전략으로 채택할 수 있는 것이다.<br/><br/><strong> 징계 해고와 정리 해고</strong><br/><br/>법을 만족시키는 해고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법률이 예정한 해고는, 엄격한 요건을 요구하는 '징계 해고'와 '정리 해고' 두 가지 경우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반복하지만, '권고사직'은 해고도 아니며 법률에 근거한 것도 아니다.<br/><br/>쉽게 이야기 하면, 징계 해고는 노동자에게 귀책사유가 있는 해고다. 징계 해고가 정당하기 위해서는, 회사가 취업 규칙상 징계 절차를 지키고 노동자 귀책사유의 예로 상당 기간의 무단결근, 정당한 업무 명령 불이행, 업무를 지속할 수 없을 정도의 비위 행위 등, 절차적 내용적 요건을 모두 만족해야만 한다.<br/><br/>정리 해고의 경우, 그 요건에 관하여 법률 자체에 매우 까다로운 규정이 명시적으로 존재한다. 긴박한 경영상 필요가 있어야 하고, 해고 회피 노력을 사전에 해야 하며, 해고 회피 방법과 해고 기준 등에 대해 근로자 대표 또는 노동조합과 성실하게 협의해야 하고,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해고 대상자를 선정해야 한다(근로기준법 제24조).<br/><br/>어떤가. 회사가 왜 권고사직을 통해 노동자로 하여금 스스로 그만두게 하려는지 그 이유를 알 만하지 않은가? 징계 해고든 정리 해고든 그 절차와 내용이 엄격하고 요건을 만족시키기 쉽지 않다.<br/><br/>최근 정부가 '일반 해고'를 도입하는 노동법 개정에 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회의 개정안 입법 이전에, 정부가 2015년 12월 30일 제시한 '일반 해고 지침'은 저(低)성과자를 해고하는 절차를 가이드라인 형식으로 만든 것인데, 쉽게 말해 '업무 성과가 낮은 자를 기준에 따라 쉽게 해고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20대 국회에서 노동법 개정안이 어떻게 통과될지 주의 깊게 지켜볼 일이다.<br/><br/><strong> 권고사직 이후, 직장 내 괴롭힘의 문제</strong><br/><br/>다시 우리 사례로 돌아와 보자. 권고사직을 거부한 노동자는 이후 마음 편히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앞서 말한, 해고보다 더한 다양한 직장 내 괴롭힘이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노동자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위해가 가해질 가능성이 있고, 인간관계에서의 소외와 무시가 왕따로 이어질 수도 있다.<br/><br/>뿐만 아니라 상사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과도한 업무상 요구를 할 수도 있으며 거꾸로 업무에서 완전히 배제시킬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 사생활을 침해당하여 인격적으로 모멸감을 느낄 수도 있다. 가히 지옥도가 펼쳐지는 것이다. (다음에는 권고사직 이후에 오는 것들-이른바 '직장 내 괴롭힘'과 관련된 다양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p>]]></content:encoded>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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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절대 사표 내지 마라! 차라리 해고 당해라!</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0518-13668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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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7 May 2016 21:56:38 GMT</pubDate>
      <description>바야흐로 다시 사직(辭職)의 시대입니다.  최근 문제되는 조선, 해운 업계 근로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삼성그룹은 선제적으로 전자, 금융 계열사 직원을 대상으로 강도 높...</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바야흐로 다시 사직(辭職)의 시대입니다.<br/> <br/> 최근 문제되는 조선, 해운 업계 근로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삼성그룹은 선제적으로 전자, 금융 계열사 직원을 대상으로 강도 높은 구조 조정에 착수했고, 상당수 인원이 명예퇴직 등의 형식으로 회사를 떠났습니다. 경제 위기 국면에 노동조합이 존재하지 않거나 조합원 자격이 없는, 대부분의 화이트칼라가 회사의 권고사직 제안을 거스르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죠.<br/> <br/> 방법이 없을까요? 양지훈 변호사가 '법과 밥'에서 권고사직에 대처하고자 노동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몇 가지 지식을 몇 차례에 걸쳐 살펴봅니다.<br/><br/>한국 경제 위기설이 끊이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눈앞에 그 실체가 드러난 것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처음인 것 같다. 경제 전문가 아닌 변호사가 보기에도 조선, 해운업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가 혹여 한국 경제 전체를 망가뜨리지는 않을지 걱정이다.<br/><br/>채권단은 위기에 빠진 회사가 추가 지원에 앞서 자구 노력을 먼저 이행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문제는 그 자구 노력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노동자 인원 감축이라는 것이다.<br/><br/>인원 감축이 실행되는 회사 내부에서는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회사는 직원을 선별하기 시작한다. 누적된 인사 평가 자료를 기준으로, 전체 직원을 '반드시 내보내야 할' 그룹, 회사 입장에서 남아도 상관없는(남지 않아도 되는) 그룹, 회사의 이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그룹 등으로 분류한다.<br/><br/>인사 팀(인력 팀)은 반드시 내보내야 할 사원의 리스트를 작성하여 해당 부서에 할당하고, 각 부서장은 대상자와의 면담 작업에 돌입한다. 이 면담의 목적은, 대상자들이 부서장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의 처지(회사에서의 위치)를 이해하고 스스로 회사를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br/><br/>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 회사의 직원 분류부터 자발적인 사직서 제출까지의 프로세스를, 회사 입장에서 권고사직이라 부를 수 있겠다.<br/><br/><strong> 사용자가 해고보다 권고사직을 선호하는 이유</strong><br/><br/>권고사직은 근로기준법 등에 규정되어 있는 법률 용어가 아니다. 그 단어의 의미대로, 이는 사직을 '권고'한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용어는 '정리 해고'나 '징계 해고'와 같은 실제 노동법상 용어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현실에서 사용자는 직원 인원 감축 방법으로, 징계 해고나 정리 해고를 통한 '해고'보다 '권고사직'을 통하는 경우가 많다.<br/><br/>사용자 입장에서 권고사직이 훨씬 유리한 것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정리 해고나 징계 해고를 당한 노동자는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통해 다툴 수 있다. 경우에 따라 회사 평판이 나빠질 수 있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며, 소송 자체로 회사가 불필요한 비용을 치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보면, 사용자는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대로 조용히' 회사를 나가게 하고 싶게 된다. 바로 권고사직을 통해서 말이다.<br/><br/>그렇다면, 사직을 권유받은 노동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부서장의 면담 스타일에 따라 면담 대상이 된 노동자가 느끼는 압박감은 실로 엄청나다. 노동조합의 조력이나 법률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는, 고립무원의 단독자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래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존심 때문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만다.<br/><br/>그 뒤에 펼쳐지는 냉혹한 자영업의 세계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회사가 정글이라면, 밖은 지옥이다." 앞으로 한국 경제가 맞이해야 할 운명이 어떤 것이 될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일개 노동자로서, 현 시점에서의 최고 전략은 어쩌면 좀 더 오랜 기간 월급 받는 삶을 연장하는 것이다.<br/><br/><strong> 절대 사직서를 제출하지 마라!</strong><br/><br/>그렇다면 다시, 권고사직 앞에서 노동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변호사로서 해줄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강력한 조언은, '절대 사직서를 제출하지 마라'는 것이다. 회사의 어떤 권유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사직서는 '회사가 원하는 대로' 노동자 스스로 자발적으로 사직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br/><br/>이 단순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구조 조정의 폭풍이 몰아치는 사무실 현장은 어떤가? 면담 대상자로 선별되어 부서장 방에 끌려가면, 오히려 스스로 위축되어 사직서에 도장 찍을 것을 강요당하는 것이 현실이다.<br/><br/>바로 그 순간, 절대 사직서에 도장을 찍으면 안 된다. 나중에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사직의 의사 표시를 했다'고 해도 일단 사직서에 도장을 찍은 일을 뒤집기는 매우 어렵다. 차라리, 회사에 의해 해고를 당하라. 다음에는 왜 차라리 해고를 당하는 게 나은지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계속)</p>]]></content:encoded>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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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quot;유부남과 40년 동거했어요. 유산은…&quot;</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0427-13593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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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6 Apr 2016 22:01:45 GMT</pubDate>
      <description>직업 군인 A는 1950년대에 B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습니다. A는 B와 불화하여 이혼할 의사를 갖고 B와 별거를 하던 중, 다른 여성인 C를 만나 40여 년간 동거하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직업 군인 A는 1950년대에 B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습니다. A는 B와 불화하여 이혼할 의사를 갖고 B와 별거를 하던 중, 다른 여성인 C를 만나 40여 년간 동거하였고 그 사이에서도 두 명의 자녀를 두게 됩니다. 이후 A는 C와 계속 동거하며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전 법률혼 관계에 있던 B에게 이혼 문제를 논의하였지만 B의 거절로 이혼하지는 못했습니다.<br/> <br/> 군인인 A가 2014년경 사망하자, 수십 년간 사실혼 관계에 있던 C는 A의 군인 연금을 받을 목적으로, C와 A가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확인받기 위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과연, C의 사실혼 관계는 법률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br/><br/>민법 제810조는 '배우자 있는 자는 다시 혼인하지 못한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한 번 혼인(결혼)하면, 이혼하기 전에 다른 사람과 혼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남성이 여러 여성과 혼인이 가능하다면 이는 일부일처제를 근간으로 하는 우리 가족법 체계를 뿌리부터 흔드는 것이 됩니다.<br/><br/>상속 문제만 해도, 한 명의 아버지 아래 여러 어머니와 자녀들이 있는 경우 계산법 자체가 복잡해지고, 혼인과 자녀 출산 시점에 따라서 복잡한 법률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이슬람국가 중 몇 나라는 여전히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일부 소수 민족의 경우 일처다부제를 가족 질서로 수용하는 것을 볼 때, 결혼 제도 역시 사회 문화적 구성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br/><br/>우리 법제에 따라 배우자가 있는 경우 다시 혼인하지는 못하지만, 사례에서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A와 B는 50여 년 동안 혼인 신고만 되어 있는 껍데기뿐인 법률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실제 A의 부인이라고 할 만한 자는 신고된 B가 아닌 40년간 동거를 같이 했던 C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의 군인 연금 수급권 판단 문제에 앞서 A와 C의 혼인이 과연 유효한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br/><br/><strong> 무효와 취소의 구분</strong><br/><br/>우리 문제에서 잠시 벗어나, 법률 용어인 '무효'와 '취소'를 먼저 구분해보겠습니다. 이 구분이 우리 사례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br/><br/>둘을 구분 짓는 것은, 쉽게 말해 '당장 효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무효란 '존재하지 않음'과 같은 말이지만, 취소란 '일단 존재하지만 없는 것과 같이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조금 어렵나요? 혼인 관계를 놓고 보면, 무효인 혼인은 처음부터 혼인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지만, 취소할 수 있는 혼인의 경우 일단 혼인한 상태는 유효하되 이를 취소하여 없는 것과 같이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br/><br/>민법상 혼인 무효 사유의 대표적인 예는 '당사자 간에 혼인의 합의가 없는 때'입니다(민법 제815조). 영화 <파이란>에서의 최민식과 장백지처럼, 부부 관계를 설정할 의사가 없는데 여성의 국내 취업을 목적으로 형식상 혼인 신고를 한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이 때 혼인 관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갖으며, 설사 최민식과 장백지 사이에 실수로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그 아이는 혼외자가 되는 것입니다.<br/><br/>혼인 취소 사유에는 근친혼이나 바로 우리 사례와 같은 이중혼이 해당합니다(민법 제816조). 이중으로 혼인을 하더라도 무효의 경우와 달리 두 혼인 모두 일단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한 명의 남성이 두 여성과 이중으로 혼인 신고를 했을 때, 두 여성 중 실질적인 혼인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여성은 다른 혼인 관계의 취소를 구할 수 있습니다. 취소란 '일단 존재하지만 없는 것과 같이 할 수 있는 것'인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이제 그 의미가 좀 더 명확해집니다.<br/><br/>그렇다면 만일 이중 혼인 관계에 있는 한 여성이 나머지 혼인 관계에 대한 취소를 구하기 전 남성이 사망한 경우 각각의 여성은 온전히 상속권을 갖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중혼은 취소 사유에 불과하고 남성의 사망 시점에 여전히 두 여성은 배우자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상속권 역시 보장되는 것입니다.<br/><br/><strong> 이중혼이 법률로 보호되는 예외적인 경우</strong><br/><br/>우리 사례에서, A는 B와 법률혼을, C와는 사실혼을 유지하는 이중 혼인 관계에 있습니다. 만약, A와 C가 이중 혼인일지라도 법률혼이라면 문제는 간명하게 해결됩니다. 취소하지 않은 C와의 두 번째 결혼 역시 유효하므로 C는 연금 수급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본대로 C는 사실혼관계에 있을 뿐이어서, 이 경우에도 'C에게 법률적 부부에 준하여 보호해주어야 하는지' 판단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br/><br/>그런데, 우리 대법원은 이미 '중혼적 사실혼 관계일지라도 법률혼인 이전 혼인이 사실상 이혼상태에 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법률혼에 준하는 보호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바 있습니다. 중혼적 사실혼 관계의 경우까지 원칙적으로 법이 보호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전(前)혼인 법률혼이 실체 없이 이혼과 같은 상태에 있는 경우에도 전혼만을 보호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므로, 이 경우는 후(後)혼인 사실혼을 보호해주겠다는 정책적 판단을 한 것입니다.<br/><br/>그리고 우리 사례를 실제 다룬 하급심 법원은, 위 대법원 법리를 적용하여 중혼에 해당하는 C의 경우에도 법률혼에 준하는 보호를 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A가 C와 법률혼이 아닌 이중혼을 유지했을지라도, B와 이혼할 의사가 있었으며 실제 46년간 동거한 자는 C였다는 점을 중하게 판단한 것입니다.<br/><br/>가족법의 영역은 재산법의 영역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릅니다. 재산법이 합리성을 추구하고 타산성에 기초한다면, 가족법은 윤리적이고 비타산적입니다. 그래서 가족법의 분쟁 해결에는, "인격의 존엄과 남녀평등을 기본으로 하고 가정의 평화를 발전"시키려고 하는 가사 소송법 특유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가사 소송법 제1조).<br/><br/>결론에 있어 이중혼 관계에 있던 C를 보호하는 법원의 판단은 가사 소송법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일까요?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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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quot;서울 본사 발령 거부했다고 해고당했어요!&quot;</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0415-135459</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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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4 Apr 2016 22:41:21 GMT</pubDate>
      <description>회사 A는 강원도 춘천에 근무하는 생산직 근로자 B를 경영 사정 악화, 인력 재배치 등을 이유로 서울 본사의 사무직으로 승진시키며 인사 발령을 냈습니다. B에게도 승진 이동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회사 A는 강원도 춘천에 근무하는 생산직 근로자 B를 경영 사정 악화, 인력 재배치 등을 이유로 서울 본사의 사무직으로 승진시키며 인사 발령을 냈습니다. B에게도 승진 이동 발령이었으나, 이미 생활 터전이 춘천이었고 익숙하지 않은 서울 본사로의 사무직으로의 전직 인사 발령이 부당하다며 무단결근을 하였고, 급기야 회사는 B를 해고했습니다. 회사의 B에 대한 해고는 정당한 것일까요?<br/><br/>일반적인 근로자(노동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B의 행위는 쉽게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회사의 인사 발령이 크게 부당한 것이 아니라면 이에 응하는 것이 근로자의 의무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기 때문입니다.<br/><br/>한편, 근로자의 생활에 있어 매우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다름 아닌 근로의 내용과 이를 제공하는 장소라고 할 것입니다. 근로자가 사용자(회사)와 근로 계약서를 작성하며 자신이 해야 할 대강의 일과 그 일을 하는 곳을 명시했다면, 사례와 같은 분쟁은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br/><br/>계약 내용대로 회사가 이행을 해야 하며, 계약의 중요 내용에 해당하므로 이를 변경하는 전직 명령을 할 경우 근로자의 동의를 반드시 받아야하기 때문입니다(근로 내용과 근무 장소의 변경은 통상 전보, 전근, 전직 등으로 혼용하나, 근로기준법 제23조 법문을 따라 이 글에선 '전직'으로 통칭합니다).<br/><br/>그러나 실제 근로관계는 매우 복잡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보통 영세 중소 사업장에서는 근로자가 계약서를 구경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근로 계약서가 존재하더라도 그 내용이 모호하거나 불분명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례의 경우에도 B는 회사와 근무 내용과 장소를 명시한 근로 계약서를 작성하지 못했습니다.<br/><br/><strong> 대법원은 전직 명령이 정당하다고 판단</strong><br/><br/>실제로 B가 회사의 해고를 다투며 전직 명령 자체가 위법하다고 소를 제기하자, 하급심은 회사의 인사 발령이 인사권 남용에 해당하여 무효이기 때문에 무단결근을 이유로 한 해고 역시 부당하다고 판단하여 근로자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근로자의 불이익이 통상 감수해야 할 범위 내의 것이므로 인사권 남용으로 볼 수 없다고 하여 회사의 편에 섰습니다.<br/><br/>대법원은 전직 명령의 정당성을 판단하는데 "권리 남용에 해당하지 않으면 원칙적으로 정당하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여기서 인사권 행사가 권리 남용에 해당하는지는, "업무상의 필요성"과 "전직 등에 따른 근로자의 생활상의 불이익"을 비교하여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근로자가 전직에 따른 생활상 불이익이 통상적으로 감수하여야 할 정도라면 그 명령이 정당한 인사권 범위 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반대로 업무상 필요성보다 생활상 불이익이 더 크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전직 명령은 부당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br/><br/>원심 법원은 전직 명령의 업무상 필요성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근로자 B가 이미 가족과 함께 춘천에 정착하여 생활하고 있고 서울이 무연고지인 점을 고려하여 인사 명령이 부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생활상의 불이익" 판단에 있어, B가 춘천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았고, 서울에 사택이 없더라도 이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므로 그 정도의 불이익은 통상 감수해야 할 불이익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br/><br/>회사의 근로자에 대한 전직 인사 명령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미묘한 영역에 놓여 있다고 할 것입니다. 특히, 현실에서는 회사가 근로자에 대한 전직 명령을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징계의 실질을 띠고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욱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br/><br/><strong> 근로자의 "생활상 불이익"을 폭넓게 인정한 판결</strong><br/><br/>위 사례와 달리, 최근 법원이 회사의 출장 명령을 거부한 근로자의 해고를 다투면서, 근로자에 대한 출장 명령의 업무상 필요성을 부정한 판결이 있어 주목됩니다. 서울행정법원은 "직원이 회사의 해외 출장 명령을 거부했더라도 출장이 지나치게 장기간이고 업무상 필요성을 인정할 수 없어 부당하다면 출장 명령 거부를 이유로 징계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br/><br/>법원은 출장 명령은 사용자의 업무 명령권으로 재량이 인정되지만, 출장 명령이 정당화되려면 근로자의 불이익을 압도할 수 있는 업무상 필요성이 구체적으로 인정되어야 하며 한 달의 해외 출장 명령이 생활상 불이익이 크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전 대법원 태도에 비해 근로자의 생활상 불이익을 매우 중하게 판단하고 있는 지점입니다.<br/><br/>특히 출장 명령의 대상인 근로자가 노동운동을 하는 자신의 남편에게 파업 중인 회사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회사가 해외 출장 명령을 이용했다는 판단도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br/><br/>임금을 받는 근로자는 회사의 지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근로 제공의 대가로 임금을 받는 관계는 종속적일 수밖에 없으며 부당한 업무, 인사 명령에 상시로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특히 노동조합 활동 등을 이유로 사용자와 상사 등에게 '찍힌' 근로자는 회사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br/><br/>이번 하급심 판결이 대법원 판결로 확정되어, 약자로서의 근로자를 보호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길 기대해봅니다.</p>]]></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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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quot;단골 약국에서 남편 얘기했을 뿐인데…&quot;</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0331-134762</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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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30 Mar 2016 22:41:22 GMT</pubDate>
      <description>광역의원에 출마하려는 예비 후보 A에게는 배우자 B가 있습니다. B가 선거법상 선거 운동 기간 이전에 평소 다니던 약국에 들러 약을 구입하면서, 약사에게 &apos;남편 A가 이번에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광역의원에 출마하려는 예비 후보 A에게는 배우자 B가 있습니다. B가 선거법상 선거 운동 기간 이전에 평소 다니던 약국에 들러 약을 구입하면서, 약사에게 '남편 A가 이번에 선거에 출마하는데 같은 김 씨니까 잘 부탁한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배우자 B의 행위는 사전 선거 운동으로 처벌받는 것일까요?<br/><br/>위 사례는 실제로 1990년 초에 광주 도의원 선거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 쟁점은, 광역의원(도의원)에 출마하려는 A를 위해 배우자인 B가 약국에 들어가 했던 말이 과연 '선거 운동'에 해당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br/><br/>먼저 '선거 운동'과 '선거 기간'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위 사건에 실제 적용된 법률은 지방의회의원선거법인데 그 내용이 현행 공직 선거법과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앞으로의 논의도 현행 공직 선거법을 기준으로 하겠습니다).<br/><br/>우리 공직 선거법은 선거 운동의 정의를 "당선되거나 당선되게 하거나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위"라고 정의합니다(공직 선거법 제58조 제1항). 그리고 선거 운동이 가능한 기간은 "후보자 등록 마감일 후 6일부터 선거일"까지(통상 2주 이내)로 정합니다(공직 선거법 제33조).<br/><br/>사례에서, B는 A가 후보로 등록하기 전에 약국에 들러 남편을 도와달라는 말을 한 것이어서 선거 운동 기간에 대해서는 다툴 수 없습니다. 문제는, 평소 다니던 약국에서 B가 약사에게 했던 '남편 A가 이번에 선거에 출마하는데 같은 김 씨니까 잘 부탁한다'는 말이 과연 선거 운동에 해당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br/><br/><strong> 김 씨니까 잘 부탁한다, 하급심과 대법원의 엇갈린 판결</strong><br/><br/>하급심은 B의 행위가 선거 운동에 해당하고, 법정 선거 운동 기간 이전에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위법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B가 '남편이 출마하는데 같은 김 씨니까 잘 부탁한다'는 말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언어 관행이나 예절에 비추어 볼 때 의례적인 인사를 한 것이지 선거 운동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판단의 주요 증거로, B가 평소 자주 이용하던 약국에 갔다는 수사 기록과 실제로 약사로부터 청심환을 구입했었다는 증언이 제시되었습니다.<br/><br/>만약 B가 약국에 들렀다가 깜빡하고 청심환을 구입하지 않은 채 잡담만 나누고 나왔다면 약국 방문 목적의 '불순함'이 인정되어 사전 선거 운동으로 처벌받았을지도 모르지요. 이를 의식한 듯 대법원도, 판결문에서 배우자 B가 애초에 남편의 당선을 목적으로 하여 약사에게 표를 얻기 위해 '김 씨니까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면 사전 선거 운동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br/><br/>대법원 판결의 내용이 왠지 모르게 군색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결 내용은 법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입법으로부터 비롯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입법 당시부터 공직 선거법에 따라 허용되는 선거 운동은 매우 제한적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허용되는 선거 운동의 범위를 넓혀 놓고, 선거 운동 기간도 더 길게 설정한다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br/><br/><strong> 미국, 독일은 선거 운동 기간 제한이 없음</strong><br/><br/>우리 공직 선거법은 허용되는 선거 운동의 범위를 좁혀 놓았을 뿐만 아니라, 선거 운동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운동원의 범위 또 선거 기간도 14일로 제한했습니다. 선거 기간만 놓고 볼 때, 미국, 영국, 독일, 캐나다, 호주(오스트레일리아) 등의 경우에는 아예 선거 운동 기간을 법률로 정하지도 않습니다. 미국은 사전 선거 운동 규제 조항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독일의 경우에는 정당 간 협정을 통하여 선거 기간을 자율적으로 규제합니다. 주요 국가 가운데 한국, 일본만이 선거 운동 기간을 2주 내로 제한하고 있을 뿐입니다.<br/><br/>물론, 선거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입하는 것 역시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공직 선거법은 선거 기간이 짧을 뿐 아니라 선거 운동 내용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다는 문제가 더해져 있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간한 선거 제도 비교 자료집(<각국의 선거 제도 비교 연구>(2015년 11월))에서도 "대부분의 민주주의 선진 국가에서는 선거 운동 기간에 대한 규제가 없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선거 운동 방법에 대해서도 규제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br/><br/>다시 한 번 전광석화처럼 지나갈 이번 국회의원 선거, 13일 후 당선자들이 국회에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차분히 논의해볼 일입니다.<br/><br/></p><blockquote><p>양지훈 변호사는 법무법인 덕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위 글의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문의 사항이 있거나 법률 상담을 원하시는 분은 메일(jhyang@iduksu.com) 또는 전화(02-567-6477~8)로 연락을 주십시오.</p></blockquote>]]></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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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quot;친구에게 아내를 양도할 수 있나요?&quot;</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0316-134084</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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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5 Mar 2016 23:11:54 GMT</pubDate>
      <description>일본 탐미주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소설 &lt;만(卍)&gt;에서, 두 남녀가 여주인공 미쓰코를 사이에 두고 매우 흥미로운 서약서(계약서)를 체결하는 장면을 선보입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일본 탐미주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소설 <만(卍)>에서, 두 남녀가 여주인공 미쓰코를 사이에 두고 매우 흥미로운 서약서(계약서)를 체결하는 장면을 선보입니다. 미쓰코의 남자 연인 와타누키와 여자 연인 소노코가, 미쓰코를 사이에 두고 의남매를 맺고 이렇게 계약을 맺습니다.<br/><br/>"만일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이 미쓰코에게 버림받을 경우 다른 한 사람도 진퇴를 함께 한다. 즉 와타누키가 버림받을 경우 소노코가 미쓰코와 교제를 끊고, 소노코가 버림받을 경우 와타누키가 미쓰코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결혼했을 경우 이혼한다."<br/><br/>여성 동성애자 미쓰코가 양성애자인지는 불분명하나, 어쩔 수 없는 처지에서 남성인 와타누키와도 혼인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소노코와 와타누키는 서로의 관계를 인정하고 안정적인 삼각관계를 유지하고자 위와 같은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br/><br/>계약서대로 관계가 진행된다면, 와타누키와 소노코는 한 명의 연인을 공유하는 이상한 의남매가 되는 것이지요. 계약서는 의남매의 권리와 의무에 더하여 미쓰코가 어느 한 명의 연인과 헤어지게 된다면, 나머지 연인도 반드시 미쓰코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 의무를 서로 부과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합니다.<br/><br/>현실에서 이러한 계약이 체결되었다면 계약 내용은 유효할까요? 위 계약에 따라 만일 소노코가 미쓰코와 헤어진다면, 미쓰코와 혼인한 와타누키는 반드시 이혼해야 할까요?<br/><br/>우리 민법을 적용하여 결론부터 말하자면, 의남매인 소노코의 관계가 정리되어도 와타누키가 이혼할 의무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계약의 내용이 무효이기 때문입니다.<br/><br/><strong> 민법 103조, 반사회적 법률 행위는 무효</strong><br/><br/>민법 제103조는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 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 행위는 무효로 한다"고 선언합니다. 계약이 '(사회 질서에 위반한) 반사회적 법률 행위'가 될 경우 무효로 하는 것이지요. 법률 행위(계약)가 무효라는 것은, 쉽게 말해 계약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br/><br/>와타누키와 소노코가 각자의 연인인 미쓰코를 공유하기 위해 위와 같은 계약을 체결했다고 하더라도, 계약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당사자들은 계약의 내용에 구속되지도 않고 계약 불이행을 이유로 상대방에게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계약이 유효하다면, 소노코가 미쓰코와 헤어졌음에도 와타누키가 미쓰코의 관계를 유지할 경우, 소노코는 계약 불이행을 이유로 와타누키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등을 할 수 있습니다.<br/><br/>무효의 원인이 된 반사회적 법률 행위를 모두 일별하여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몇 가지 유형으로 보면, '정의 관념에 반하는 행위'(증언의 대가로 금전을 증인에게 지급하기로 하는 불법적인 대가 지급 약속), '가족 질서 등 인륜에 반하는 행위'(부첩 계약이나 처의 이혼 시에 내연녀와 혼인하기로 하는 혼인 예약),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행위'(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혼하지 않겠다는 서약) 등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br/><br/>소설에서의 계약서는 인륜에 반하는 행위이자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행위에 해당할 수 있어 무효가 됩니다. 민법의 대원칙인 계약 자유의 원칙과 달리 민법 제103조가 반사회적 법률 행위를 무효로 선언하는 것은, 법률 행위의 내용이 적법해야 한다는 보충적인 규정을 통해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계약에 일정한 규제를 하겠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br/><br/>예컨대 부첩 계약을 계약 자유의 원칙에 따라 허용한다면 일부 일처제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의 결혼 제도는 사회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우니, 애초에 부첩 계약을 무효로 선언하고 결혼 제도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참고로 부첩 계약에는 민법 제103조가 적용되지만, 이중 혼인을 금지하는 규정은 민법 제810조가 적용됩니다("배우자있는 자는 다시 혼인하지 못한다").<br/><br/><strong> 작가의 아내 양도 사건, 반사회적 계약의 이행</strong><br/><br/>흥미로운 사실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실제 '아내 양도 사건'을 통해 반사회적 법률 행위를 몸소 실천하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다니자키가 서른 살이었던 1915년, 첫 번째 결혼한 아내 치요코를 친구였던 하루오에게 양도하기로 약속했다가 이를 한 번 번복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자키가 1930년에 이르러서 결국 아내와 이혼하고 아내가 하루오와 결혼한다는 공동 명의의 발표문을 신문에 게재하는 아내 양도 사건이 발생합니다(다니자키는 두 번 이혼하고 세 번 결혼합니다).<br/><br/>다니자키가 친구인 하루오와 약속한, 아내 양도 계약은 당연히 반사회적 법률 행위로 무효입니다. 계약의 유효 무효를 떠나서, 양도의 대상이 된 아내 치요코는 다니자키와 이혼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경우에 따라 이혼을 거부하며 재판으로 이혼을 다툴 수도 있으며, 하루오와의 혼인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br/><br/>그러나 소설보다도 더 소설 같은 일이 현실에서 발생합니다. 다니자키와 하루오, 그리고 양도 대상이 된 아내 치요코 세 사람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아내 양도 계약을 착실하게 모두 이행합니다. 당사자들이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계약을 이행함으로써 가볍게 법률의 영역을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지요. 법률도 개인의 사사로운 영역에서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사 표시와 그 이행을 막을 수 있는 강제력은 없는 것입니다.<br/></p><blockquote><p>양지훈 변호사는 법무법인 덕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위 글의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문의 사항이 있거나 법률 상담을 원하시는 분은 메일(jhyang@iduksu.com) 또는 전화(02-567-6477~8)로 연락을 주십시오.</p></blockquote>]]></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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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quot;출퇴근길 교통사고, 산재 보상 받나요?&quot;</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0302-133683</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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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1 Mar 2016 22:08:45 GMT</pubDate>
      <description>근로자가 업무상 재해로 다쳤거나 질병에 걸렸을 때, 재해 근로자의 보상과 복귀를 돕기 위한 법률로 &apos;산업재해보상보험법&apos;(산재법)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근로 시간 중 작업장...</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근로자가 업무상 재해로 다쳤거나 질병에 걸렸을 때, 재해 근로자의 보상과 복귀를 돕기 위한 법률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법)이 있습니다.<br/><br/>일반적으로 근로 시간 중 작업장에서 근로자에게 발생한 사고는 업무상 재해로 산재법에 따라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로자가 출퇴근하는 시간은, 엄밀히 말하면 근로 시간이라고 볼 수 없어 산재법상 보상의 대상이 되는지 문제가 됩니다. 이에 대해, 산재법 시행령 제29조는 출퇴근 중의 사고를 놓고 다음처럼 규정합니다.<br/><br/></p><blockquote><p>제29조(출퇴근 중의 사고) 근로자가 출퇴근하던 중에 발생한 사고가 다음 각 호의 요건 모두에 해당하면 법 제37조 제1항 제1호 다목에 따른 업무상 사고로 본다.<br/> <br/> 1. 사업주가 출퇴근용으로 제공한 교통수단이나 사업주가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교통수단을 이용하던 중에 사고가 발생하였을 것.<br/> <br/> 2. 출퇴근용으로 이용한 교통수단의 관리 또는 이용권이 근로자 측의 전속적 권한에 속하지 아니하였을 것.</p></blockquote><p><br/>위 규정에 따르면, 출퇴근 사고는 원칙적으로 산재법상 보상이 되는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않지만, 예외적으로 근로자에게 출퇴근 교통수단의 선택권이 제한되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업무상 재해로 보상합니다. 일반적으로 근로자가 자가용 승용차를 이용하여 출근하던 중 발생한 사고는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지 않으며, 회사가 통근 버스를 제공한 경우 발생한 출퇴근 사고는 업무상 재해로 인정됩니다.<br/><br/><strong> 자가용 승용차 출퇴근 시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는 경우</strong><br/><br/>경우에 따라 자가용 승용차로 출퇴근 시에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업무 장소나 회사 출퇴근 시에 대중교통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등의 사정으로, 출퇴근 교통수단 선택에 있어 근로자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러한 경우 법원은 출퇴근 과정이 사업주의 지배 관리 아래 있었다고 판단하여 업무상 재해로 봅니다.<br/><br/>또 다른 예외로, 출퇴근 도중에 근로자가 업무를 처리한 경우나 통상의 출퇴근 시간 이전 혹은 이후에 업무와 관련한 긴급한 사무 처리를 한 경우에는, 자가용 승용차로 출퇴근을 하더라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br/><br/><strong> 공무상 재해와의 차이, 부당한 차별</strong><br/><br/>이와 같이 일반 근로자의 경우 원칙적으로 출퇴근 시 발생한 사고는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기 어려운데, 공무원의 경우는 매우 손쉽게 '공무상 재해'가 인정됩니다. 그것은 '공무원연금법' 시행 규칙 제14조의 규정 때문입니다. 즉, 공무원의 경우에는 "통상적인 경로와 방법으로 출근·퇴근하거나 근무지에 부임 또는 귀임하는 중 발생한 교통사고"는 모두 공무상 재해로 보는 것이지요.<br/><br/>공무원인 근로자와 일반 회사 근로자가 같은 승용차를 타고 출근하다가 교통사고가 발생한 경우, 공무원은 공무상 재해로 보상을 받게 되지만 근로자는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합니다. 매우 불공정하며 합리적이지 않은 차별이 법령에 따라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일반 근로자들의 보상 범위를 넓히기 위하여 산재법을 개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br/></p><blockquote><p>양지훈 변호사는 법무법인 덕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위 글의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문의 사항이 있거나 법률 상담을 원하시는 분은 메일(jhyang@iduksu.com) 또는 전화(02-567-6477~8)로 연락을 주십시오.</p></blockquote>]]></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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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quot;재산 포기 각서, 이혼할 때 한 푼도 못 받나요?&quot;</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0217-133290</link>
      <guid isPermaLink="true">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0217-133290</guid>
      <pubDate>Tue, 16 Feb 2016 23:17:54 GMT</pubDate>
      <description>부인 A는 남편 B와 이혼하기로 합의하면서, 남편의 요구에 따라 &apos;A는 위자료를 포기합니다. 재산 분할을 청구하지 않습니다&apos;는 내용의 각서를 작성해주었습니다.  이들은 각서를...</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부인 A는 남편 B와 이혼하기로 합의하면서, 남편의 요구에 따라 'A는 위자료를 포기합니다. 재산 분할을 청구하지 않습니다'는 내용의 각서를 작성해주었습니다.<br/> <br/> 이들은 각서를 작성한 날 법원에 협의 이혼 의사 확인 신청서를 제출했고, 한 달 후 협의 이혼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A는 변호사를 통해 수천만 원 이상의 재산 분할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A는 B에게 재산 분할을 요구했죠. 이 경우 각서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br/><br/>부부 이혼 시 재산 분할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액수 또는 비율은, 법률에 의해 정해진 바가 없고 당사자의 협의와 조정에 따라 정해집니다. 다만, 협의가 불가능한 경우 이혼 당사자의 청구에 의해서 법원이 부부 협력에 의해 이룩한 재산의 액수와 기타 사정을 참작하여 재산 분할을 하게 됩니다(민법 제829조의2 제2항).<br/><br/>원칙적으로 이혼 전 미리 재산 분할 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혼으로 인한 재산 분할 청구권은 이혼이 성립한 때에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므로, 아직 이혼에 이르지 않은 경우에는 포기할 대상인 권리가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결혼 초에 부인이 남편에 대해 '향후 이혼 시 재산 분할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약속했더라도, 실제 이혼에 이른 경우 부인은 남편에게 재산 분할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부인이 신혼에 했던 사전 포기는 무효가 되기 때문입니다.<br/><br/><strong> 예외적으로 협의 이혼 시 재산 분할 청구권 포기가 허용될 수 있습니다.</strong><br/><br/>다만, 부부가 협의 이혼 중 양 당사자의 합의로 재산 분할 포기 약정을 하는 경우, 그 포기는 약정으로서 인정되고 효력이 있습니다(재판상 이혼의 경우, 포기 약정은 인정되지 않고 법원이 재산 분할을 직권으로 판단합니다).<br/><br/>같은 협의 이혼에 있어서도, 앞서 본 '사전 포기'는 무효지만, '포기 약정'은 협의 이혼 성립 조건으로 유효하다는 것이 법원의 태도였습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혼하기도 전에 미리 재산 분할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이혼하기로 먼저 합의를 하고 일방이 재산 분할 포기 약속을 하면 이는 유효하다는 것이지요.<br/><br/><strong> 포기 각서에도 불구하고 재산 분할 청구권을 인정한 사례가 있습니다.</strong><br/><br/>그렇다면, 오늘 사례의 경우에도 A와 B가 협의 이혼을 하면서 재산 포기 각서를 작성한 것이 '포기 약정'으로 해석되어, A는 재산 분할을 청구할 수 없을까요?<br/><br/>하급심 법원들은 모두 A에게 재산 분할 청구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지만, 최근 선고된 대법원 판결은 달랐습니다. 대법원은 A에게 재산 분할 청구권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A가 작성해 준 각서의 내용과 작성 경위가, 이혼을 앞둔 부부 사이에 재산 분할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통해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없으므로 각서가 무효로 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부 사이에 "쌍방의 협력으로 형성된 재산액이나 쌍방의 기여도, 분할 방법 등에 관하여"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만 협의 이혼에서의 재산 분할 포기 약정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br/><br/>대법원 판결은, 재산 분할 포기 각서 등이 내용과 관계없이 형식적으로 존재하기만 하면, 곧바로 '포기 약정'으로 판단했던 하급심 법원과 달리 각서의 작성 경위 등에 주목한 것입니다. 즉, 포기 각서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재산 분할에 관하여 쌍방이 진지하게 논의하고 구체적이고 합리적으로 그 내용을 적시하지 않았다면, 각서는 '사전 포기'로 무효가 된다고 본 것이지요.<br/><br/>특히, 사례에서는 A가 이혼 성립 후 전 남편이 된 B에게 화를 내며 재산 분할을 요구하자, B가 A에게 '독립할 자금이 필요하면 주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발송했다는 점도, 재산 포기 각서를 무효로 보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재산 분할 포기 약정이 이미 진지하게 합의됐다면, A가 아무리 B에게 재산 분할을 요구하더라도 그 요청을 들어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요.<br/><br/><strong> 헌법상 '혼인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 평등을 기초로 유지되어야'</strong> <br/><br/>결국, 부부가 협의 이혼을 하면서 재산 분할 청구권을 일방이 포기하고 이를 약정하기 위해서는, 부부 공동 재산 전부에 대한 분배 의도가 있어야 하고, 분할 대상 재산액과 이에 대한 부부의 기여도와 분할 방법 등을 명확히 하는 등 매우 구체적인 내용으로 합의가 존재해야만, 재산권 포기 약정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br/><br/>이번 대법원 판결에 따라, 지난 2년간 협의 이혼한 당사자 가운데 포기 각서의 존재만으로 재산을 분배받지 못한 억울한 경우에는, 재산 분할을 청구하여 법원의 판단을 받을 수 있게 된 점도 고무적인 일입니다. 또 해당 판결은 이혼 후 경제적 자립 능력이 떨어지는 부부 한쪽을 보호하면서 합리적으로 재산을 분배하도록 하여, 헌법상 양성 평등의 원칙에 따라 혼인 관계를 정리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에서, 긍정적인 의미가 큰 것으로 판단됩니다.<br/></p><blockquote><p>양지훈 변호사는 법무법인 덕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위 글의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문의 사항이 있거나 법률 상담을 원하시는 분은 메일(jhyang@iduksu.com) 또는 전화(02-567-6477~8)로 연락을 주십시오.</p></blockquote>]]></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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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quot;임대차 계약서 &apos;특약&apos;은 무조건 지켜야 하나요?&quot;</title>
      <link>https://workdignity.com/posts/pressian-20160203-13301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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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03 Feb 2016 01:05:11 GMT</pubDate>
      <description>2016년 프레시안이 새로운 연재를 선보입니다. 프레시안의 &apos;열성&apos; 조합원 양지훈, 이은의 두 변호사가 매주 독자 여러분에게 다양한 법률 지식을 전달합니다. 가슴이 뜨거운,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2016년 프레시안이 새로운 연재를 선보입니다. 프레시안의 '열성' 조합원 양지훈, 이은의 두 변호사가 매주 독자 여러분에게 다양한 법률 지식을 전달합니다. 가슴이 뜨거운, 발로 뛰는 두 젊은 변호사의 생생한 경험이 녹아 있는 색다른 칼럼을 기대하십시오. 첫 스타트는 법무법인 덕수에서 일하는 양지훈 변호사가 끊습니다. '양지훈의 법과 법' 연재를 시작합니다.<br/><br/>한 재력가가 서울의 각광받는 상권에 대규모 주상 복합 건물을 신축하고, 분양 물량을 제외한 나머지 점포는 월 임대료를 받고 빌려주기로 했습니다. (이 재력가를 앞으로 '건물주 A'라고 부르겠습니다.)<br/><br/>건물주 A는 점포를 물색 중이던 B와 입지가 가장 좋은 점포의 임대차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계약서에는 "임차인(상가 세입자)의 귀책사유로 본 계약이 해지되는 경우 신규 임차인이 확보되기 전까지의 임대료 및 관리비 전액을 임대인(건물주)에게 지급하여야 한다"는 특약 사항을 추가하였습니다.<br/><br/>세입자 B는 유동 인구가 많고 상권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어 비교적 높은 월 임대료에도 불구하고 점포를 임차하고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손님은 별로 없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임대료도 내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br/><br/>원래 상가 임대차 계약은 5년으로 되어 있었지만, 결국 세입자 B는 계약 1년 만에 월 임대료를 3회 이상 납입하지 못하여 건물주 A에 의하여 임대차 계약을 해지 당했습니다. 한편, 세입자 사유로 계약을 해지할 경우, "신규 임차인이 확보되기 전까지 임대료와 관리비 전액을 임차인이 부담한다"는 특약 사항 때문에 계약 해지 후에도 임차인의 손해가 막심할 수 있었습니다.<br/><br/>그렇다면, 세입자는 계약 해지에 따른 모든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특약 사항 조항을 무효로 하고 B가 손해를 감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약 사항이 임차인에게 부당하게 불리하기에 무효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br/><br/>우리 민법은 계약 자유의 원칙에 따라 당사자의 자유의사 아래 체결된 계약으로 사회 질서에 어긋나거나 불공정한 것이 아니라면 해당 계약 내용은 당사자 모두를 구속시키며, 계약을 불이행할 경우 그 당사자에게 책임을 지웁니다.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라틴어 Pacta Sunt Servanda)"는 유명한 법 경구는 이를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지요.<br/><br/>마찬가지로 임대차 계약 역시 건물주와 세입자를 동시에 구속합니다. 그래서 건물주는 통상 5년으로 하는 상가 임대차 계약 기간 동안 임의로 임대차 계약을 해지할 수 없습니다. 또 세입자에게도 같은 의무를 부과하죠. 그런데 이렇게 자유롭게 체결된 계약이라면, 세입자 B에게는 억울한 사정이 전혀 없을까요?<br/><br/>건물주 A는 특약 사항을 본인에게 매우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례와 같이 신규 건물 주변 상권 발달이 예상 외로 부진하고, 건물주가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그렇지요. 건물주는 특약 사항을 악용하여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는 데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서도, 계약에 묶여 있는 세입자 B같은 이에게 임대료와 관리비를 모두 부담시킬 수 있습니다. B가 계약을 해지당하고 점포를 건물주 A에게 인도하더라도, 세입자로서 임대차 계약의 남은 기간 동안(3년여 이상) 어쩔 수 없이 월 임대료와 관리비를 계속 부담해야 하는 부당한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br/><br/>세입자 B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요?<br/><br/>일반적인 경우, B는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임대차 계약을 체결한 것이므로 특약 사항에 구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계약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지요. 다만 경우에 따라, 세입자는 상가 주인에게 임대차 계약서 특약 사항이 '무효'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br/><br/>특히 이른바 '약관규제법(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이라는 특별법에 근거해서, 세입자는 계약 특약 사항을 문제 삼을 수 있습니다. 약관규제법상 '약관'은 "그 명칭이나 형태 또는 범위를 불문하고 계약의 일방 당사자가 다수의 상대방과 계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일정한 형식에 의하여 미리 마련한 계약의 내용"을 말합니다(약관규제법 제2조 제1호).<br/><br/>사례의 특약 사항이 B뿐만 아니라, 같은 상가 주인 A의 다른 세입자들(C, D, E 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고, 같은 문구로 미리 준비된 계약서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면, B는 이를 근거로 임대차 계약이 '약관'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A는 이미 인쇄된 임대차 계약서로 동일한 특약 사항을 모든 점포 임차인에게 적용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B는 임대차 계약이 약관규제법상 '약관'에 해당된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br/><br/>여기서 '약관'이 문제되는 것은 약관규제법이 민법의 대원칙인 계약 자유의 원칙을 보호하기 위해서 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상가 주인과 같은 임대 사업자가 임대차 계약을 일방적으로 혼자 작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제적 우월성을 이용하여 자신에게만 유리한 쪽으로 정하는 것은 결국 (세입자의) 실질적인 계약 자유의 원칙이 실현되지 않는 결과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규제한 것이죠.<br/><br/>임대차 계약 과정에서는 계약 자유의 원칙이 보장되도록 세입자가 상가 주인과 흥정이나 협의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즉, 약관규제법은 상가 주인이 스스로 작성해둔 임대차 계약서를 세입자 모두에게 강요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법률의 규제인 셈이죠.<br/><br/>결국, 임대차 계약은 '약관'에 해당되고 "신규 임차인이 확보되기 전까지의 임대료 및 관리비 전액을 임대인에게 지급하여야 한다"는 계약 특약 사항은, 이른바 손해배상액의 예정에 해당되며(민법 제398조 제4항), 세입자 B는 부당하게 과중한 손해배상 의무를 부담시키는 약관 조항임을 이유로(약관규제법 제8조) 임대차 계약 특약 사항을 무효라고 할 수 있습니다.<br/><br/>앞서 살핀 바와 같이 건물주가 자기 필요에 의해 상가 세입자를 확보하지 않기로 특약 사항을 악용하는 경우에도, 세입자는 원래의 임대차 기간 만료일까지, 그것이 1년이 될지 3년이 될지 모른 채 나머지 임대료와 관리비를 배상할 의무를 부담하므로, 이는 세입자 B에게 매우 부당하여 불공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br/><br/>임대차 계약의 특약 사항은 임차인 B에게 공정성을 잃은 조항으로써 무효이므로, B는 부당한 손해배상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다만 사례의 경우 B는 계약의 내용이 '약관'에 해당됨을 이유로 부당한 손해를 면했지만, 임대차 계약의 '약관' 해당 여부가 다른 모든 임대차 계약에 적용될 수 있는지는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통해 주의 깊게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br/><br/></p><blockquote><p>양지훈 변호사(jhyang@iduksu.com)는 법무법인 덕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위 글의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문의 사항이나 법률 상담을 원하시는 분은 메일로 연락을 주십시오.</p></blockquote>]]></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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